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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님과 함께 산다는 것

우리 집에는 이모님이 함께 살고 계신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육아 도우미라는 직업을 가지고 계신 이모님이다. 이가 태어났을 때 전형적인 월급쟁이였던 나는 매일 출퇴근을 해야만 했고 와이프는 3년간 로스쿨을 마치고 막 변호사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장모님께서는 수원에서 이미 처형의 아이를 돌봐주고 계셨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자라야 한다고 믿었던 이 맞벌이 부부에게 육아 도우미는 단 하나의 선택지였다.


우리는 육아 도우미 정보 공유 사이트를 통해서 이모님을 만났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스스로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이모님께는 실례지만 전에 일하던 집과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을 채용의 조건으로 삼고 있었다. 전에 일하던 집과 일을 떠난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최소한 이전에 일하던 집에서 이모님에 대해 염려하는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는 증명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첫 번째 이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흑룡강 출신이었던 첫 번째 이모님은 신생아를 보는 솜씨도 좋았고 요리, 청소, 빨래 등 살림살이 솜씨도 매우 좋으셨다. 성격도 무척이나 쾌활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전 집하고 관계가 좋으셨다. 전의 집 사모님과 통화를 했는데 우리의 이모님에 대한 추천과 칭찬이 마르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모님도 그 부분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과연 전의 집에서 추천해주었던 그 말대로 이모님은 아이도 잘 돌보시고, 집안일도 잘하셨다. 그런데 이전에 계시던 집하고 관계가 너무 좋으셨던지 이모님의 입에서는 항상 전의 집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전의 집에서 아이를 키우던 얘기며 전의 집 사장님은 이런 일을 하셨고, 전의 집 사모님과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매일 들으니 마치 새로 알게 된 친구네 집 이야기를 카톡으로 전해받는 느낌이었다. 


마침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게 된 아내는 온전히 그 얘기를 하루 종일 매일매일 받아주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나도 저녁에 퇴근하여 아이와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에도 이모님의 전의 집 레퍼토리를 온전히 들어야 했다. 하지만 아이를 워낙 잘 봐주시기도 했고, 성격이 워낙 쾌활하셨어서 우리도 적당히 기분 좋게 대꾸해드리고 지냈다.




일이 생긴 건 이모님의 생일 때였다. 이모님의 생일이 되자 아내와 나는 생일 케이크와 생일 보너스 개념으로 20만 원을 따로 넣어서 봉투에 드렸는데, 생일 선물을 받고 이 쾌활한 이모님이 며칠간 말이 없어진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는데, 며칠 뒤 아내가 나에게 낮에 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이모님께서 전에 집에서는 생일에 50만 원을 받았는데, 우리가 20만 원을 드려서 속상하다고 하시더라."라고 아내가 말했다. 전에 집에서는 생일에 준 보너스도 많았고 퇴직할 때도 퇴직금을 하라고 돈을 주었는데, 아이를 보는 이모에게 생일 선물이 너무 적었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 전에 일하시던 집이 굉장히 잘 사는 집이라는 것은 이모님을 통해서 여러 번 듣고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듯 손주가 태어나자 할머니가 용돈으로 몇 백을 주었다더라 하는 식의 집이었는데, 그 간 전해 들었던 전의 집 이야기는 그냥 티브이 드라마와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모님도 뭔가 우리에게 전의 집과 비교하며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생일 선물로 돈을 적게 주어서 속상하다는 얘기가 참으로 속상했다.


"이모를 바꿔야 하나."라고 내가 말했다. 무언가 믿었던 부분이 깨져버린 느낌이었고, 앞으로 한 번 비교를 시작했으니 계속 비교하면서 지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내에게 말을 꺼냈지만 아내는 자기가 이모랑 잘 얘기했다고 말했다. 우리 둘이 맞벌이 기는 하지만 아파트를 산 대출금에 이모님의 급여에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과 그에 따른 죄송함, 그리고 아이를 돌봐주는 감사한 마음을 잘 설명했다고 했다.


아내의 얘기가 잘 통했는지 이모님은 그다음 날부터 원래의 쾌활한 이모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이모는 반년 정도를 더 우리와 함께하시다 아이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그만두시게 되었다. 떠나실 때는 아내와 손잡고 서로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서로의 정(情)도 깊게 되었다. 




모든 이모님의 경우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가 겪은 이모님들은 참 전에 계시던 집 얘기를 좋아하신다. 이후에 새로 이모님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지내고 있지만, 지금 이모님께서도 여전히 전의 집 얘기를 매일매일 전해주고 계신다. 처음에는 도대체 전의 집과 우리 집이 무슨 관계라고 친척도 아닌데 그렇게 시시콜콜 전의 집 얘기를 하시나 싶었지만 어느 순간 이모님의 하루를 생각해보니 이모님의 삶에는 지금 이 일들만이 가득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교포 출신의 이모님들은 원래는 중국 땅에서 본인의 일자리나 가정이 있었던 분들이다. 기업을 다니던 분도 계시고, 선생님을 하셨던 분도 계시고 농사를 지었던 분들도 계시다. 물론 전업 주부를 하셨던 분들도 계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에서는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있던 것이다. 일상은 그곳 중국에서도 당연히 반복되었겠지만 퇴근을 하면 낮에 있던 일들을 공유할 가족들이 거기에 있던 것이다. 


그런 분들이 더 나은 급여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와 가정집 상주 육아 도우미를 하시게 되면 그분들의 일상은 온전히 상주하는 집 안으로 한정되게 된다. 집안에서 겪은 일들과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이 월요일부터 주말까지 계속되며, 평일에는 온전히 본인의 일상을 공유할 상대방이 이 집 사람밖에 없는 것이다. 낮에 부부가 모두 출근이라도 해버리면 이모님의 말 상대는 말 못 하는 우리 아이 하나만 남게 되는 상황이다. 


이모님께서 전의 집에서 있던 일을 얘기하는 것은 본인이 겪어온 삶의 흔적을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마침 아이도 점점 자라고 있어서 요즘은 전의 집 얘기보다 낮에 아이와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시는 비중도 조금씩 늘어가고는 있으니 점점 더 들을만해진다. 


생일 사건과 같이 전에 일하던 집하고 비교는 어떻게 할 거냐고? 나도 회사 다니면서 처우가 안 좋으면 구시렁거리기도 하고 이직을 할라치면 연봉 협상, 처우 협상 같은 건 당연히 하니까,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끼리의 비즈니스 협상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내가 공자님 같은 분은 아니라 그 순간이 오면 당황스럽고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이모님이 못할 얘기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렇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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