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창업가의 꿈과 현실②] 주말 사장
▲ 창원터널 직장 출퇴근길 매일 지나다녔던 창원터널
2015년 3월 8일, 8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이로써 15년 동안의 내 직장생활은 끝이났다.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 그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크게 반대하시며 걱정을 많이 하셨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늦둥이 아들과 자신이 '굶어죽을까' 두려우셨던 모양이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타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릴적부터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환경탓에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대우 받기 힘든 '고졸' 학력으로 살아남기 위해 아주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예쁜 옷 입고 대학 다닐 때에도 나는 어두컴컴한 공장 바닥에서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며 악착같이 버텼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졸업할 즈음에 의무검정 시험으로 '거저주는' 자격증을 하나 가지고 있던터라 군대 대신 '산업기능요원'으로 경력 단절을 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결과인지 나는 내가 속한 조직 내에서 또래 친구들보다 월등하게 빨리 승진했고 연봉도 더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내 성격은 한곳에서 계속 똑같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어떤 분야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그 조직내에서 더이상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배울 것이 없다 생각하면 무조건 그 조직을 나와 새로운 일을 찾았다. 그러다 운좋게 타지생활을 마치고 집 근처에 있는 한 대기업에 입사를 하게 됐다. 그리고 이내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정착했다.
대기업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중소기업은 실력에 따라 얼마든지 내가 빠른 승진과 연봉 등 역량에 따른 대우를 받을 수 있었지만 대기업은 달랐다. 큰 조직답게 그만큼 보수적인 '룰'이 있었고 제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중소기업에서처럼 파격적인 인사는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기업이라는 조직안에서 '학벌'은 더욱 크게 작용했다.
중소기업 여러곳에서 다양한 업무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던 나는 대기업에 입사해서도 나름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원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대기업이라는 곳은 개인의 역량보다 대인관계, 명분 등이 필요한 '정치'를 더 잘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든게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덕에 연말 고과 평가 결과가 바뀌기도 했고 '발탁 승진' 대상에서 갑자기 떨어지기도 했으며 추천된 모범사원 후보에서 수상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런 상황에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조금씩 거기에 물들어 갔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나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또 누군가를 까내리는데 바빴다. 그렇게 바깥 세상과는 상관없이 내부에서 치열한 경쟁과 견제를 하며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다.
평생을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와서였을까? 2013년 나는 건강검진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암 치료를 위해 4개월간 회사에 병가를 내고 태어나 처음으로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내 인생 첫번째 창업
내 나이 서른 둘, 암 투병생활을 시작하고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수술 받고 회복을 하기 위해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고 모처럼 경쟁과 견제의 스트레스 없이 마음가짐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암 진단을 받고도 해당연도의 내 고과 평가가 이 걸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했었던 나인데, 아주 큰 맘 먹고 병가를 내며 모든걸 내려놓아서 그런지 한결 더 마음이 편했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뭔가를 하고 싶었다. 병가 상태이긴 했지만 회사에 소속되어 월급도 100%는 아니지만 꼬박 꼬박 받고 있었기에 다른 일을 할 순 없었다. 엄연히 취업규칙에도 '투잡금지'가 명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일이 아니라 뭔가의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고 싶었는데 평생 일만 하고 살아온 내가 딱히 할 줄 아는게 없었다.
평일에는 온통 운동과 투병일기를 블로그에 쓰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릴적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이 생각나 조금씩 다시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주말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나 찾다가 우연히 결혼식 '하객 대행' 아르바이트를 찾게 됐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그걸 핑계로 주말이라도 집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며 '일상 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 두가지 일이 내 인생 첫 창업아이템을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거의 매 주말마다 부산, 경남일대의 예식장을 다니며 아주 많은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웨딩 시장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렇게 나는 나중에 회사에 복직을 하고 나서도 주말에 양복을 입고 결혼식장을 다녔다.
▲ 홈스튜디오 내 일을 시작하면서 내 방은 홈스튜디오로 변신했다
집에서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간단한 영상을 만들어 내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넣어 인터넷에 올렸다. 순전히 이건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다.
그러다 우연히 한 포털사이트 '지식인' 코너에서 결혼식을 준비하는 예비 신랑이 축가 무대를 멋지게 꾸미기 위해 음악을 리믹스 하고 동영상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보게 됐다. 그 사람은 내 사업의 첫 고객이 됐다.
내가 직장생활이 아닌 무언가로 돈을 번다는 사실이 너무 신났다. 진짜 얼마 안되는 작은 돈, 하지만 그 가치는 내가 직장에서 받는 수백만원 월급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가진 능력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돈을 지불하고 일을 맡겼음에도 작업이 끝나고 나서 너무 고맙다며 인사하는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뭔지 모를 감동을 느꼈다.
내 첫 고객과의 상담 과정, 그리고 그 콘텐츠를 제작해주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결과물을 샘플로 만들어서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올렸다. 나는 병가를 내고 쉬는 동안 태어나 처음으로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 투병일기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내 투병일기는 이내 포털사이트 1페이지를 장악했고 내 블로그는 유명해져 하루에 1천명이 넘는 방문자가 있었다.
블로그, 하객대행 아르바이트 그리고 어릴적부터 독학으로 배워온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 이 세가지가 합쳐져 내 첫 사업아이템이 됐다. 블로그로 영업하고 하객대행 아르바이트로 시장을 조사했으며 어릴적부터 10년이 넘게 혼자 공부해온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을 다루는 기술이 내 핵심역량이 됐다.
내 첫 고객의 후기를 보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내 블로그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달에 한건, 일주일에 한건, 조금씩 나에게 일을 맏겨주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났다. 회사에 복직을 한 다음에도 내 일은 계속 됐다. 건수가 많지 않았기에 찾아오는 고객분들께 '주말에 작업이 가능하다'고 안내를 한뒤 주말 이틀은 오롯이 내 방이 사무실이 됐다. 그렇게 나는 '주말 사장'이 됐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평일에는 회사를 나가고 주말에는 내 일과 하객대행 아르바이트로 바쁘게 지냈다. 그 결과 내 부업으로 인한 수입은 내가 한달에 버는 월급의 1/5 수준이 됐다. 웨딩 관련일이라 시즌에 따라 달랐지만 어느정도의 가능성을 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직장을 그만뒀다. 이미 내 심장은 내 일에 쿵쾅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더이상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미루며 살고 싶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계산을 했다. 내가 회사를 나오면서 받을 수 있는 돈으로 과연 몇달을 버틸수 있을지, 그리고 그 시간안에 내 일을 더 많이 만들어 내 생활비를 벌 수 있을지.
'혹시 내가 계산한 시간안에 예상한 수입을 만들지 못하면,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시간을 더 벌어보자'
내가 직장을 나오면서 생각한 결론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기 6개월전부터 나는 생활습관을 미니멀라이프로 바꿨다. 대기업 사원으로서 필요했던 품위 유지비나 다른 사람들 시선 때문에 쓰던 돈, 다른 동료들을 헐뜯기 위한 모임으로 인해 나가던 술값 등 실제 내가 한달을 살아내는데 필요한 돈이 아닌 지출들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신용카드도 없애고 체크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세상밖으로 나왔다. 전쟁터를 떠나 지옥으로 나왔다. 나를 설레게 만드는 일이 지옥에 있다면 지옥 불구덩이라도 한번 뛰어들어보고 죽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암 수술을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대에 누으면서 생각했다. '여태까지 내가 좋아하는일 한번 못하고 왜 이렇게 치열하게만 살아왔을까?' 그 후회는 내가 내 일을 시작한 확실한 동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