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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Feb 26. 2020

잘하지 못해도 나는 '힙합을 할래'

서른넷 방구석 래퍼의 음원 발매 프로젝트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장기자랑시간만 되면 교실 앞쪽 공간을 무대삼아 온 교실을 누비고 다녔던 나. 그 때부터 나는 끼가 많은 아이였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나름 개그 센스도 있어서 인기 많은 아이였다.


1996년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지누션'이라는 그룹이 한국 가요계에 데뷔를 하면서 '힙합'이라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 때 당시에 '가솔린' 도입부의 멜로디가 너무 좋았고 칼칼한 션의 랩핑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후속곡 '말해줘'의 빠른 랩을 따라부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랩'을 좀 더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었다. 그 뒤로 나는 왠만한 힙합음악의 랩을 모두 카피해서 따라 불렀고 노래방에서 무슨 노래든 간에 '랩'파트가 나오면 친구들은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가끔 다른 학교 아이들과 노래방에서 가창력 자존심 대결이 이루어지곤 했는데 승패가 갈리지 않을 때 친구들은 나를 비장의 무기로 쓰기도 했다. 그 때 드렁큰 타이거의 '너희가 힙합을 하느냐' 한번 불러주면 전부다 나의 랩 실력에 뻑이 가곤 했었다.

열아홉, 고등학교 3학년. 랩퍼를 꿈꾸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라 수능의 압박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업도 잘 하고 대학을 가려고 하는 아이들은 공부에 매진하는데 나는 친구들과 학교 땡땡이를 치고 부산대학교 앞에 있는 노래방에서 죽치고 놀기 일쑤였다. 어느날 우연히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던 '댄스팀 랩퍼모집' 전단지를 보게 되었는데 필이 딱 꽂혔다. '나 랩은 좀 하지' 라는 생각에 당장 그 댄스팀 연습실로 달려갔다.

부산에는 많은 아마추어 댄스팀들이 있다. 그 댄스팀들에는 한두명씩 '랩퍼'가 소속되어 있는데 댄스 공연하기전 수십초짜리 랩파트에서 자신의 댄스팀을 소개하거나 하는식의 랩을 했다. 내가 들어간 댄스팀에 속한 랩퍼 형은 피부만 황색이지, 덩치가 아주 커 미국 할램가에서나 볼법한 흑인 랩퍼나 다름 없었다. 그 형은 모든 공연에서의 랩을 '프리스타일'로 해치웠다.

다른 가수들의 랩만 따라 불러오면서 살아온 나에게 프리스타일 랩이란 '신세계'였고 내가 얼마나 작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팀 단장 형님은 'DJ'였는데 컴퓨터 하나로 공연음악 리믹스를 척척 해냈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마이크로 다시 녹음을 하면서나 음악을 편집할 수 있다는 내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경험. 그 들을 보면서 나는 나만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곧 다른 지방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의 음악 인생은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4년이 흘러 어느덧 내 나이 서른둘이 되었다. 한순간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온 적 없는 내 인생. 결국 나는 '암'이라는 병에 걸리고 투병생활을 하면서 '후회'를 하게 되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지독하게 살아온건지. 

사경을 넘나드는 투병생활속에서 결국 내가 찾은건 '음악'이다. 진짜 내 음악.
                                                                                                                                                  

컴퓨터나 태블릿PC 하나만으로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


나의 음악은 간단한 장비들로 만들어 진다.  '힙합을 할래'는 태블릿 PC의 어플리케이션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어느 날 잘려고 누워서 테블릿 PC를 가지고 놀다가 1시간여만에 만들어졌다.


지금까진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곡에다가 가사를 쓰고 나의 랩을 덮어씌운 노래만을 불러왔다. 그런 나에게 있어 내가 직접 만든 곡에다 랩을 한다는 사실은 나를 몹시 흥분시켰다. 만들어진 노래를 듣고 또 듣고 하면서 어떤 가사를 쓸까 고민하다가 대한민국의 모든 랩퍼들이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나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잊고 있던 나의 꿈을 다시 꺼내어 이루어 보겠다.'는 나의 의지를 2분 30여초의 곡에 함축해 담았다. 내 진심을 담은 노래라 그런지 주변의 몇몇 지인들은 나의 노래가 좋다고 칭찬을 해줬다. 지인이기 때문에 해주는 입에 발린 칭찬이라 할지라도 내 자식 같은 내 노래가 좋다고 해주니 하늘을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음악에 대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창시절 리코더나 단소 시험을 보기 위해 연습했던것이 내가 다룰줄 아는 악기의 전부다. 게다가 화성학도 모른다. '코드' 역시도 모른다. 가사에 나오는것과 같이 나의 음악은 '노가다'로 만들어진다. 한음 한음 들어보고 귀로 듣기 좋은 연결이 나올때까지 또 눌러보고 들어본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나의 힙합이다.


나의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라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가 길거리 공연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다 찾은 방법이 바로 '음원 프리마켓'이다. 국내에는 몇개의 음원 프리마켓 사이트가 있다. 자신의 음악의 가격을 아티스트나 고객이 마음대로 조정해서 거래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프리마켓의 경우 서비스 회사 입장에선 소위 말해 '돈'이 별로 안되기 때문에 서비스의 질이 낮다. 그래도 나 같은 방구석 아티스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다.


내 몇곡의 노래들을 프리마켓에 올려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가격은 500원. 약 1년여간을 판매했지만 유료 다운로드는 총 3회. 수익은 1,500원이 발생했다.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내 노래를 누군가가 돈을 내고 다운로드 받아 듣는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행복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1,500원의 수익금은 고스란히 서비스 회사의 몫으로 돌아갔다. 판매금액의 70%를 아티스트에게 준다고 하지만 최소 몇만원 이상의 금액이 쌓여야 정산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같이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는 판매금액 마저도 서비스 회사에 빼앗기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 돈을 정산 받을 수 없으니까.


나의 음반을 갖고 싶다.


프리마켓을 경험하고 나니 내 음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디지털 음반이라도 내 이름이 붙은 음반을 내고 싶었다. 요즘 음반시장은 예전처럼 고액을 들여 CD를 제작하는 수고가 필요없다. 디지털로 CD없이 음원만 바로 유통이 가능한 구조다. 게다가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아티스트들의 음원을 유통해준다는 회사들도 많다. 그 들은 메이저 음원차트를 운영하는 회사들과 계약이 되어 있고 아티스트들에게 노래를 받아 자신들의 회사 이름을 붙여 음원챠트 회사에 제공한다. 거기서 팔리는 노래들의 수익을 나눠먹고 산다.


기획사도 없이 나처럼 혼자 음악하는 사람들에게 내 음반을 갖기란 꿈 같은 이야기다. 그러니 이런 회사들이 많이 생겨나고 그 회사들을 거쳐서 음원을 낸다. 하지만 그 수익구조는 참혹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 그 문을 두드릴수밖에..


나도 세차례 음반을 내고자 그 회사들중 2군데의 회사를 골라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세번을 다 퇴짜를 맞았다. 퇴짜이유는 내 음악의 '퀄리티'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퀄리티'란 '예술성'과는 달리 음악을 만들고 녹음하는 과정인 일명 믹싱과 마스터링이라고 하는 엔지니어링 미숙으로 인해 발생된다. 프로 음악가들은 작곡가 따로 편곡자 따로 작사가 따로 가수 따로 음악 엔지니어 따로 모두가 전문화 되어 있지만 가난한 방구석 아티스트는 그 모든걸 혼자 열악한 환경에서 해결해야 한다. 아직 나는 그 부분이 미숙한거다.


세번의 고배를 마신뒤 현재 나는 와신상담중이다. 다른 가수들의 랩을 카피해서 부르던 내가 직접 가사를 쓴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렇고 내가 작곡이라는걸 처음 도전해서 완성곡을 처음 뽑아 내었을 때에도 그랬다. 항상 처음엔 힘들고 두렵고 포기하고 싶었다. 심지어 '이거 안해도 인생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내가 왜이러고 있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앞서 그 2번의 시련을 견뎌냈다. 이제 내 음반을 가지고 싶다는 목표까지 단 한번의 고비가 남아있다.


앞으로 몇번의 실패를 더 경험해야 하고 마음의 상처를 얼마나 더 받아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34년 인생동안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꼭 이루어 낼 것이다. 이제는 두번 다시 다른길로 가지 않으련다. 느려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가다보면 오아시스는 꼭 나타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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