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졸사원이다 38] 산업기능요원 소집해제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컨테이너 출하 파트에 일손이 부족해 지원을 가면 컨테이너 가득 제품을 직접 손으로 옮겨 싫었다. 한겨울에도 컨테이너 하나 작업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나는 군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군대를 가는 걸 대신해 '산업기능요원' 제도를 선택했고 35개월간 2개의 중소기업에서 최저 임금을 받으며 근무했다. 복무만료를 6개월 남겨두고 강원도 삼척에 있는 23사단 육군 훈련소에 입소해 4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이등병'의 계급으로 소집 해제됐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현역을 다녀온 사람들이 시샘 어린 말투로 산업기능요원 출신들을 무시하곤 했다. 물론 그들이 힘든 군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사회에서 따뜻한 밥 먹으면서 자유롭게 지냈다. 하지만 그 어떤 일에도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현역 판정을 받은 사람이 산업기능요원이 되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들다. 병무청에서 각 사별로 정해준 인원 제한이 있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다. 일부 회사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인원 제한을 이용해 소위 말하는 '희망 고문'으로 어린 친구들을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밀어 넣기도 한다. 그렇게 부려먹고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이라도 시켜주면 다행인데 결국 산업기능요원 편입을 시키지 않고 군대를 가게 만드는 일도 더러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사들이 산업기능요원에게는 '최저 임금'을 적용했다. 나름 자격증을 보유한 고급 인력들인데 최저 임금을 주고 임금 인상을 시켜주지 않아도 최소 3년간은 이직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한 달에 잔업을 100시간을 채워도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이 100만 원이 채 안 됐다. 군대와 달리 아무런 보급품 없이 사비로 생활을 해야 하는 산업기능요원들은 나처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대를 가면 계급이 올라갈수록 '고참'이 된다. 계급이 올라갈수록 생활이 조금씩 편해진다. 물론 그래 봐야 군대지만 말이다. 반면 산업기능요원은 편입이 된 그 순간부터 복무 만료가 되는 그 순간까지 말단 사원이다.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회사의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서 해야 한다.
이렇듯 산업기능요원으로써의 생활도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현역들이 가질 수 없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내게 '다시 태어나도 군대 안 가고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할 거냐?' 묻기도 하는데 내 대답은 언제나 'Yes'다.
추운 겨울날 기초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강원도 삼척에 있는 23사단 육군 훈련소에 입소했다. 겨우 4주 들어가는데도 마음이 싱숭생숭했고 입소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제야 비로소 입대하는 친구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았다.
입소 첫날부터 퇴소하는 그날까지 달력에 빨간색 X표를 해가며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리고 퇴소하는 날, 좋지도 않은 그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자유를 되찾았다는 생각에 너무 신나 어쩔 줄을 몰라했다.
처음 산업기능요원이 됐을 때 가끔 선배들이 '며칠 남았냐?'라고 장난스럽게 물으면 '천…, 칠십사일 남았습니다'라면서 1000일이 넘게 남은 복무기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가. 어느새 나는 복무만료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말년'의 모습이 돼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출하 검사실 후배를 몇 달간 열심히 가르친 덕분에 나의 말년은 조금 수월하게 지나갔다. TV와 CCTV를 생산하던 우리 회사는 CCTV 생산이 중단됐고 이제 오롯이 TV 라인만 가동됐다. 그 덕에 동생이 혼자서 검사실 업무를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나는 간간이 동생과 함께 일을 하면서 다른 부서 일손이 모자란 곳이 지원을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 제일 지원 가기 싫었던 곳은 바로 '출하 파트'였다. 출하 파트는 회사 도크장(트럭에 짐을 수월하게 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치)으로 컨테이너가 들어오면 만들어진 제품을 컨테이너 안에 적재를 해서 물건을 내보내는 일을 하는 곳이다.
회사에서 제품이 생산돼 나와 창고에 적재가 될 때는 파렛트(한 번에 여러 대의 물건을 쌓아 올려 지게차로 옮길 수 있게 만든 판)에 올려 지게차로 이동시켰다. 컨테이너에 물건을 실을 때는 파렛트 없이 전부 손으로 물건 들어 옮겨서 적재를 해야 했다. 컨테이너 하나 작업을 하고 나면 한겨울에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출하 파트 지원을 다녀오면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기도 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산업기능요원 복무
▲ 합격증 고졸 신분으로 사회에 나와 부딪혀보니 대학 진학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직장인 특별전형으로 '사이버대학'에 진학했다
2005년 6월 13일 월요일. 드디어 나는 35개월간의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마치고 '민간인' 신분이 됐다. 1000일이 넘는 이 복무기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처음 산업기능요원이 되기 위해 20살에 무작정 구미로 올라왔던 나는 벌써 스물넷이 됐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20대 초반에 맞이하는 가장 큰 인생의 고충인 '군대'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친구들은 예쁜 옷 입고 대학 캠퍼스를 누빌 때도,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싸이월드에 여행 사진을 올릴 때도, 나는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했다. 민간인이 되던 그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나의 20대 초반과 맞바꾼 이 시간을, '민간인'이 된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 복무가 만료되는 6월 13일 자로 2년 넘게 다녀온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그만두기 일주일 전 다른 회사에 면접을 봤고,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받으며 그다음 주부터 출근을 하기로 돼 있었다. 그 사이 내게 주어진 휴가는 일주일. 그 시간 동안 푹 쉬면서 쌓인 피로를 풀기로 했다.
열아홉 나이에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여러 곳의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1년 넘게 근속해서 '퇴직금'이라는 걸 받을 수 있었던 회사는 내가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하던 이 회사가 처음이 됐다. 근속기간 2년 3개월. 항상 최저 임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퇴직금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생처음으로 받아보는 '목돈'이 통장으로 들어왔을 때 그 통장에 찍힌 숫자들을 보면서 웃었다.
현역으로 군대를 가는 것보다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를 하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바로 '경력'이다. 어찌 됐던 나는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하면서 지금 스물넷의 나이로 품질관리 분야에서 3년이 넘는 경력이 쌓였다. 게다가 수리사로 근무하면서 회로 해석 능력 또한 갖췄기 때문에 이 업계에서 근무하는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항상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처음 사회에 나와 중소기업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를 한 몇 년 동안 하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대학 진학'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라 오면서 '대학'이라는 건 항상 남의 이야기였다. 단 한 번도 내가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부딪혀본 사회는 달랐다. 그 졸업장 하나가 있고 없고 가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는데 있어 크게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산업기능요원 복무가 끝나고 다른 회사에 취직해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이버대학'에 진학했다. 만약 이런 생각을 조금 더 일찍 했더라면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를 하면서 대학 졸업장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산업기능요원 복무만료 이후의 내 인생이 조금은 더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군대 대신 산업기능요원이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