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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Jan 22. 2016

고졸사원 앞에 줄 선 석·박사급 사원들

[나는 고졸사원이다 41] '납땜의 신'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첫 출근, 그런데 자리가 없다
                                                                                  

▲ 새로 옮긴 사무실 임시로 사용하던 사무공간에 새 프로젝트팀이 들어오면서 신뢰성센터 실험실 옆 작은 공간으로 사무실을 이사했다.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마치고 총원 6명의 작은 스타트업에 새로 취업했다. 회사는 아주 큰 대기업의 사내 협력업체로 그 대기업 연구소에 있는 '신뢰성 센터'를 대신 운영하는 업무 도급 회사였다. 그 덕에 나는 그 대기업 정규직들도 출입이 까다로운 그 대기업 연구소를 매일  들락날락할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들어가본 대기업 연구소에는 400명가량의 연구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400명의 연구원들 중 60%가량이 석·박사급 인력들이고 나머지 40%가 학부 인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아주 소수로 전문대를 졸업한 연구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담당 업무는 경리나 총무로, 제품 개발 담당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진 않았다. 


연구소가 있는 4층의 중앙을 가르는 복도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아주 큰 사무실이 있었다. 좌측 사무실이 연구실, 우측 사무실이 개발실로 2개의 실로 구성된 조직이 그 대기업의 연구소였다. 대략적으로 연구실에서는 새로운 모델의 선행 개발이 진행되고 개발실에서는 양산 중인 제품의 보완과 더불어 선행 개발이 완료된 제품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업무를 했다.


중앙 복도를 따라 연구실과 개발실 사무실을 지나면 각 실의 작업장이 나온다. 작업장은 연구원들이 제품을 개발할 때 가장 오랫동안 근무하는 공간으로 제품의 분해 조립과 간단한 테스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지나면 옥상이 나오는데 건물 4층에 위치한 이 연구소는 옥탑형으로 3층의 옥상을 마당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옥상은 연구원들이 머리를 식히며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는 공간이었다.


2005년 6월 22일. 우리 1기 멤버들은  그곳으로 첫 출근을 했다. 우리는 그 대기업에 출입을 할 수 있는 사원증이 없었기 때문에 입구에서 사장님을 만나 경비실에 신분증을 맡기고 임시출입증을 받아 들어갔다. 


난생처음해 보는 경험에 싱글벙글 웃으며 연구소로 올라갔다. 그런데 도착한 연구소에서 우리가 있을 공간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대기업 쪽과 사장님 간의 의사소통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연구소가 있는 건물 4층 로비에 한참을 서성거리고 있으니 개발실이 있는 사무실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연구원 한 명이 나와서 우리를 안내해줬다. 


우리가 간 곳은 개발실 사무실을 지나 작업장 입구에 높은 파티션이 쳐진 사무공간이었다. 연구소에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사무공간이 많았다. 그 공간은 프로젝트팀이 사용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새로운 제품 개발이 시작되면 각 부서의 담당자들을 차출해 임시 부서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프로젝트팀이 가지는 별도의 임시 사무실인 거다.


얼마 전 프로젝트가 끝나 비워져 있는 사무공간을 우리가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사무실에는 딱 책상과 의자만 놓여 있었다. 사장님의 책상에는 급하게 데스크톱 PC 한 대를 설치해줬고, 우리는 빈자리에서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렇게 출근 첫날 우리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옥상에 담배만 피우러 왔다 갔다 했다. 


새로운 조직에 처음 합류를 하면 기존 사원들은 모두가 가까운데 나 혼자만 그들과 섞이지 못하는 이질감이 든다. 그 어색함을 타파하지 못하면 그 조직에 흡수되지 못하고 다시 튕겨져 나온다. 어찌 보면 직장을 옮기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그런 점인데 우리는 모두가 창립멤버로 면접을 볼 때부터 이미 하나가 돼 있었기 때문에 출근 첫날이었지만 우리끼리 뭉쳐서 잘 지낼 수 있었다.


다음날 역시도 우리는 하릴없이 멍하니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첫날과는 달리 우리에겐 1부의 문서 파일이 주어졌다. 그 문서는 바로 PDP(Plasma Display Panel - 평판디스플레이의 한 종류)의 신뢰성 테스트 매뉴얼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운영해야 할 '신뢰성 센터'에서 할 일인 것이다. 그 매뉴얼을 보고 공부를 하라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미션이었다.


책자를 펼쳐서 매뉴얼을 보는데 신기하게도 대부분 내가 아는 내용들이었다. PDP라고는 하지만 어찌 됐건 내가 몇 년간 만져오던 브라운관 TV와 같은 디스플레이 소자라서 모든 용어와 테스트 방법이 같았다. PDP건 LCD(Liquid Crystal Display - 평판디스플레이의 한 종류) 건 디스플레이 표현 방식이 다른 소자일 뿐 그 소자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선명하고 또렷한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테스트 방법은 최초의 소자인 브라운관의  그것과 같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함께 입사한 창립멤버 4명 그리고 관리자로 입사한 과장님까지 총 5명 중에 디스플레이 관련 업종의 경력이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매뉴얼을 동료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임시 강사가 됐다. 내가 다른 직원들에게 그 매뉴얼에 나오는대로 테스트 방법과 이론교육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사장님은 아주  흡족해하시면서 옆에서 거들어 주셨다.


오전 8시에 출근을 해서 오후 5시에 퇴근을 할 때까지 그 매뉴얼 책자 하나를 5명이서 돌려 보며 며칠을 보냈다. 일이 없어서 한가하고 매일 칼 퇴근을 했지만 일 없이 빈둥거리는 하루는 너무 길었다.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뭔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입사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임시로 사용하고 있던 우리 사무실에 다른 프로젝트 팀이 들어와야 한다며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다. 그 길로 우리는 신뢰성 센터에 있는 실험실 옆 조그만 사무공간으로 이사를 갔다. 출입문도 없이 높은 파티션으로만 만들어진 그 사무실에 있을 때보다 실험실 옆 작은 공간이지만 독립된 공간에 들어오니 마음이 약간은 가벼워졌다.


그리고 일주일이 더 지났을 때야 비로소 우리에게 일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그 일은 바로 연구소 내 각 부서 파견 근무였다. PDP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신뢰성 센터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연구소 내 각 부서에 우리를 파견시켜 연구 보조일을 하면서 업무를 배우도록 할 계획인 것이었다.


'납땜' 부탁하려고 줄 서서 기다리던 석·박사급 연구원들


▲ 납땜 연구원들이  어려워하던 부품 교체 작업을  대신해주면서 '납땜 잘하는 친구'로 유명해졌다 


우리 창립멤버 4명은 그렇게 각 부서로 흩어졌다. 나는 연구실에 있는 한 부서에 배치를 받았는데 그 부서는 현재 양산하고 있지 않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곳이었다. 역시나 정식 부서가 아닌 프로젝트 팀이었고 그 팀의 이름은 새로 개발되고 있는 제품의 모델명이었다.


나는 그 부서에 배치되면서 그 부서가 사용하고 있는 작업장 귀퉁이에 자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 부서 막내 연구원에게 붙여졌고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다. 연구소에서 생기는 허드렛일이라고 해봐야 연구원들이 실험하고 어질러 놓은 작업장을  뒷정리하거나 제품의 분해 조립을 대신하는 일 정도였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해서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가 소속된 부서의 작업장으로 갔는데 나와 함께 일하는 막내 연구원이 보드 하나를 가지고 낑낑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니 그 보드에 결합돼 있는 부품 하나를 교체해야 하는데 그 연구원의 납땜 실력이 떨어져서 그 부품을 보드로부터 탈거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부품의 다리가 삽입되는 보드의 홀(구멍)이 좀 빡빡하게 설계가 돼 있어 많은 연구원들이 그 부품을 교체할 때마다 이렇게 애를 먹는다고 했다. 나는 그 막내 연구원에게 잠시 내가 해보겠다고 말하고는 그 부품을 탈거 해줬다. 다른 부품들보다는 좀 까다롭긴 했지만 탈거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부품을 어렵지 않게 탈거 하는 모습을 보던 그 막내 연구원은 놀라면서 어떻게 '인두기(납땜기) 질을 그리 잘하냐?'고 물었다. 그런 사소한 거에 놀라면서 칭찬하는 그 막내 연구원 덕분에 괜히 쑥스러워져서 머리를 긁적 대며 '이전 직장에서 수리사를 하면서 하루 종일 인두기 질 하는 게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정말 사소한 이날의 에피소드가 연구소에 소문이 났다. 그리고 그 부품을 교체하기  힘들어하는 연구원들은 교체해야 할 보드와 부품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그 부품을 교체해주면 그 모습을 보면서 크게 감탄을 하고는 다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연구원들을 대신해 그 부품을 교체해주면서 인생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 일이, 그냥 나는 그들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보조를 해주는 사람인데 겨우 이렇게 별것 아닌 일에 '석·박사급' 연구원들이 줄을 서서 나에게 부탁을 하려고 찾아오니 말이다. 나는 그 단순한 에피소드로 연구원들에게 '납땜 잘하는 친구'로 알려지게 됐다.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석·박사급의 연구원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의 연구보조 협력업체 직원이다. 처음 그 부서에 파견을 가게 되었을 때는 나와는 레벨이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의 기에 눌려 직급이 아직 없는 평 연구원들에게도 '연구원님'이라고 부르며 극 존칭을 쓰며 나를 낮췄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날의 '납땜 에피소드'가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 후 부서 회식도 함께 가고 연구원들과도 좀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덧 작업장 한 귀퉁이에 있던 내 의자가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이 연구소가 내 집처럼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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