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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Jan 26. 2016

연구소 옆 샤워실과 세탁기, 침대가 말해주는 것

[나는 고졸사원이다 42] 환경 챔버 비상 대기를 맡다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수면실 연구소 구석진 회의실에는 며칠 동안 집에 가지 못하는 연구원들을 위해 준비된 수면실도 있었다 


대기업의 연구소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우리 회사에는 '연구 보조' 이외에 추가적인 일이 들어왔다. 그 일은 바로 야간에 신뢰성 센터에 있는 '환경 챔버(급격한 온습도 변화 스트레스를 시험하도록 만든 룸형 설비)'의 정상 가동 여부를 체크하는 '비상대기' 역할이었다.


연구소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은 제품 개발이 진행되면 실제로 제품을 설계할 때보다 테스트에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제품 개발은 테스트를 통해 발견된 문제점 개선의 반복이었다. PDP 역시 수만 가지 테스트 항목들이 있었지만 급격한 환경 변화에도 정상적인 작동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환경시험이 제일 까다로운 항목이었다.  환경시험을  진행하느라 밤새 환경 챔버 앞에서 잠 못 이루는 연구원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대기업,  그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사원들만 올 수 있는 연구소인데 옆에서 본 그들의 삶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오후 11시가 넘어도 사무실엔 항상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주말에도 많은 연구원들이 출근해서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제품을 붙들고 있기 일쑤였다.


연구소는 다른 부서와 달리 화장실 뒤편에 샤워장이 있었고 샤워장 한편에는 세탁기가 있었다. 제품 개발을 위해 며칠씩 퇴근을 하지 못하는 연구원들을 위해 만들어둔 공간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연구소 구석에 있는 커다란 회의실 안에는 2층 침대만 수십 개 놓여 있는 수면실도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오롯이 회사에만 매여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그 대기업 사내 협력업체에 취직한 우리들과 석사 학위를 가지고 그 대기업 연구소에 입사한 신입 연구원들의 연봉 차이는 2배였다. 그 정도로 많은 급여를 받으면서 복지 혜택 또한 훌륭한 회사에 입사를 하려고 그들은 집을 떠나 여기 '구미'라는 도시로 왔을 것이다. 처음엔 마냥 부러움의 대상이기만 했던 그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런 연구원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우리 회사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연구소 기획 부서에서 신뢰성 센터 야간 비상대기 업무를 우리에게 맡겼다. 새로운 업무가 주어지면서 우리 회사는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게 되었고 총원 6명으로 시작했던 우리 회사의 사원수는 10명까지 늘어났다.


사장님은 이력서를 보내온 대부분의 친구들에게 입사의 기회를 주었다. 날라리 같은 친구도 있었고 역량이 아주 떨어지는 친구도 있었지만 '사람은 가르치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셔서인지 사장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공부'를 강조하셨다. 이런 대기업의 인프라를 직접 보고 만지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며 가능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라고 하셨다.


실제로 사장님의 말씀처럼 그 대기업의 연구소에는 아주 비싼 고가의 장비들이 아주 많았다. 중소기업에서는 가격 때문에 구입 엄두도 못 내는 장비들이었다. 그 설비와 장비들의 사용법만 제대로  마스터해서 바깥에 나가도  먹고살 수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과 함께 근무를 하고 있으니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여온 장비의 특성이나 사용법이 궁금하면 대기업의 이름을 빌려 그 업체에 연락했다. 그러면 그 장비 업체의 기술 담당 사원이 직접 와서 교육도 시켜주곤 했다. 그만큼 그 대기업의 브랜드 파워는 막강했고 우리는 그 대기업 사원은 아니었지만 외부업체에게 그 대기업 사원과 비슷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시험 의뢰서', 감동이었다


▲ 신뢰성 테스트 우리에게 첫 번째 '시험의뢰'가 들어왔다. 


새로운 업무가 주어지고 우리는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야간 비상대기 근무를 했다. 낮 시간 동안 파견을 나간 부서에서 연구 보조 업무를 하고 저녁 시간부터 신뢰성 센터에 상주를 한다. 환경 챔버에는 항상 테스트를 진행하는 제품들이 들어가 있었다. 한번 들어간 제품은 일주일씩 연속으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한밤중에도 장비는 계속 가동됐다. 


비상 대기자는 시간대별로 신뢰성 센터 순찰을 돌면서 '장비는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고 있는지', '환경 챔버 안에 넣어 놓은 제품이 쓰러지거나 해서 깨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새벽에는 신뢰성 센터를 청소한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라는 사장님의 지시였다.


내가 산업기능요원이 되고 처음으로 QC(Quality Control)가 되어 부품 신뢰성 테스트를 할 때 환경 챔버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때 사용하던 챔버는 책장만 한 크기로 고온 테스트를 할 수 있게 만든 장비 수준이었는데 이 대기업에 설치된 챔버는 드넓은 신뢰성 센터에 룸식으로 설치가 된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비였다. 또한 영하 40도에서 고온 80도까지 급격한 온도 변화와 더불어 습도까지 마음대로 조절을 할 수 있었다.


사장님은 그 환경 챔버의 관리를 우리가 맡길 원하셨다. 지금은 단지 야간에 비상 대기를 하면서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수준이지만, 우리가 환경 챔버의 오퍼레이터가 되어서 연구원들이 우리에게 제품만 맡기고 테스트 의뢰를 하면 우리가 대신 테스트를 진행하고 결과 리포트까지 뽑아서 연구원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하셨다.


사장님의 그 의견은 곧 우리 회사를 담당하는 연구소 기획부서에  전달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연구 보조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경 챔버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 문제는 어마 어마한 대기업의 백그라운드를 이용해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은 바로 환경 챔버 회사에 연락해서 교육을 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환경 챔버를 납품한 회사의 엔지니어에게 교육을 받았다. 챔버를 수리하거나 챔버에 대한 기술적인 교육이 아닌 운용을 위한 오퍼레이팅 교육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몇 시간의 교육과 몇 번의 실습으로 우리는 환경 챔버의 오퍼레이터가 되었다.


환경 챔버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 되었지만 연구원들은 우리에게 테스트를 맡기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자신의 제품을 자식같이 생각했으므로 자식을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아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우리들의 테스트 역량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아 못 미더워서 의뢰를 하지 않는 이유가 가장 컸다.


우리 회사를 담당하는 기획부서 연구원이 신뢰성 센터에 테스트를 의뢰하지 않는 이유를 파악해 보았다. 그 결과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연구소로 들어온 외부 인력들은 '연구  보조'일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불신의 벽을 넘어야 했다. 그래야만 단순히 '연구 보조'를 넘어 신뢰성 센터 '담당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담당 연구원과 함께 Gage R&R(측정의 정밀도를 나타내는 에러 수준) 이벤트를 준비했고 그 결과를 전체 연구소에 배포하면서 우리의 테스트 역량이 신뢰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 홍보 메일이 뿌려지고 난 뒤 밤샘 테스트에 지친 연구원 한 명이 찾아와 우리에게 테스트를 의뢰했다. 그 연구원도 우리들의 역량을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는데 도저히 피곤해서 직접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에게 대신 맡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진 시료(테스트 샘플) 3대와 테스트 항목이 쓰인 '시험 의뢰서'는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첫 번째 자체 시험이 진행되던 날 우리는 사장님을 포함한 10명이 모두 모여 함께 그 테스트를 진행했다. 소중하게 찾아온 기회에 너도 나도 계측 장비를 한 번 잡아보겠다며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장님도 아주  흡족해하셨다. 이렇게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 사이에서 한참이나 부족한 고졸 학력의 우리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조금씩 꿈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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