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빠투툼 appatutum Feb 04. 2016

전시 제품의 고장,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46] 디스플레이 전시회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전시회 디스플레이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연구원과 함께 구미 박정희 체육관으로 갔다 


2005년 10월 27일부터 5일간 구미시 '박정희 체육관'에서는 <2005 구미 디스플렉스> 전시회 행사가 진행됐다. 행사에는 '디스플레이' 관련 업체들의 제품이 전시되었는데 당연히 우리 회사가 소속되어 있는 대기업에서도 홍보 부스 하나를 맡아 제품을 전시했다.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던 날, 연구소 기획부서에서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행사에 전시할 제품을 가져가 전시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인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꼭 함께 가게 해달라고 사장님께 요청을 했다. 


그 연구원은 우리 회사를 QE(Quality Engineer) 그룹에서 관리하기 전에 우리 회사 관리를 담당하던 사람이다. 우리 회사의 실적이 곧 그 연구원의 실적이었으므로 동거 동락하며 친하게 지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고 내가 관리자가 되었지만 내가 편했는지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했다.


우리가 소속된 연구소는 PDP TV 완제품을 개발하는 곳이 아니라 PDP '모듈'(패널과 일부 회로만 부착된 반제품 상태)을 개발하는 곳이다. 전시회에도 PDP TV가 아닌 모듈 상태로 전시를 해야 하는데 PDP 모듈의 경우 별도로 제작된 거치대 없이는 세워 놓을 수가 없는 제품이었다.


전시회 준비를 함께 하게 된 연구원과 나는 PDP TV 완제품을 가지고 전시회장으로 갔다. TV 케이스를 분리 해낸 상태로 속의 모듈이 보이도록 전시를 할 계획이었다. 그럴 경우 TV 스탠드가 조립된 상태로 세워 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보기 흉한 거치대도 필요 없었고 훨씬 깔끔해 보였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에 도착해 우리 홍보부스로 갔다. 박정희 체육관 내에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여러 업체들의 홍보부스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유명한 대기업 홍보부스를 비롯해 떠오르는 LCD TV 중소기업들의 이름도 보였다. 특히 우리 홍보부스 맞은편에는 S전자의 홍보부스가 있었는데 벌써 전시회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살짝 들여다보니 최신형 휴대폰과 더불어 휴대폰과 연결해 즉석에서 사진을 출력할 수 있는 기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주 신기한 제품이었다.


우리는 제품을 전시할 위치를 잡고 TV를 박스에서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전동 드라이버를 이용해 TV 후면 커버를  분리시켰다. 후면 커버가 분리되자 내부에 있는 보드들과 더불어 PDP 모듈이 보였다. 이 상태로 DVD를 연결해서 영상을 틀고 전시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되는 거였는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TV 전원을 켜는 순간 셧다운(전원이 켜짐과 동시에 다시 꺼져버리는 불량 현상)이 걸리며 화면이 나오질 않았다. 큰일이었다. 대체할 TV는 준비된 게 없었고 당장 전시회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상황이라 어떻게든 이 TV를 살려내야 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온 연구원은 기획 부서에서 'Paper Working'(서류를 만들 과 관리하는 일)만 하는 사람이라 기술적인 부분은 몰랐다.


당황을 한 우리는 잠시 침착하고 회사에 있는 해당 모델 담당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어 해결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전화를 걸어 증상을 설명하고 해결방법에 대해서 물었지만 직접 제품을 본 것도 아니고 PDP 모듈 담당 연구원이 TV 완제품의 문제까지 알 수 없었기에 아무런 성과 없이 전화를 끊어야 했다.


제품의 문제로 전시회에 차질이 생기면 이 전시회 준비를 담당하는 연구원은 회사에서 깨질게 분명했다. 그래도 나름 나와는 아주 가깝게 형, 동생 하며 지내는 사이인데 그 사람의 체면을 살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그 제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TV에 전원을 인가하면 후면에 달린 팬(제품 내부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달린 장치) 2개가 돌아가면서 회로가 동작하고 화면이 켜진다. 그런데 이 제품은 2개의 팬 중 1개의 팬이 전원을 인가해도 동작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비정상 모드가 되어 화면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저 팬을  교체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전시회장에서 그 부품을 구할 수 는 없었다.


그 제품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고민하는 나를 보며 그 연구원은 '방법이 없으니 이제 그만 포기하라'며 '전시회 둘째 날부터 제품을 전시하자'고 했다. 하지만 바로 맞은편 부스에서 경쟁업체는 신기한 제품으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텐데 아무것도 보여줄 것 없는 부스 상태로 하루를 비워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 연구원에게 잠시 기다려보라며 보드와 팬이 연결되어 있는 전원 케이블을 잘랐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동작하던 팬에 비정상적으로 동작하던 팬에 연결되었던 케이블을 병렬로 함께  연결시켰다.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병렬로 1개의 팬에 2 단자를 동시에 연결하면 완전히 불량이 난 팬 때문에 다른 회로가 동작하지 않는 현상은 제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조심스럽게 TV에 전원을 넣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TV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아주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이 나왔다. 한참 동안을 켜 둔상태로 지켜봤지만 TV는  별문제 없이 잘  작동되었다. 그리고 후면 커버를 분리해둔 상태에서 전시할 것이기 때문에 팬이 돌지 않아 내부 온도가 올라가서 생기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갑작스럽게 생긴 문제를 해결을 하고 나니 아주 뿌듯했다. 이전 직장에서 '수리사'로 근무하면서 전자회로의 기초지식을 연마한 게 이렇게 써먹을 때가 있었다. 그 연구원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고 아주 놀랐다. 이 에피소드는 그 연구원에게서부터 '제품 개발 담당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아주 역량이 뛰어난 인재'라는 소문이 나게 됐다.


우리 쪽의 지원 덕분에 전시회가 차질 없이 잘 진행되었다며 기획부서 그룹장님이 직접 사장님께 찾아와 인사를 전했다. 사장님은 아주 기뻐하셨고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우리 회사의 창립 첫 번째 송년 회식에서 나는 '공로상'을 받았다. 그리고 공식적인 상 이외에도 사장님께서는 연말에 나를 다른 직원들 몰래 사무실로 불러서 '인센티브'를 따로 챙겨 주시기도 했다. 봉투에 빳빳한 새 돈으로 준비한 사장님의 마음이었다.


기쁘고 좋은 일도 많았지만 스물넷의 나에겐 여전히 그 관리자라는 자리가 무겁고 힘들기만 했다. 그리고 점점 '엔지니어'에서 멀어지는 나를 보며 '이대로 괜찮은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곤 했다. 


대기업 부장보다 협력업체 사장이 낫다


▲ 이직 나는 결국 이직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경력이 더 쌓이면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중소기업 공장장 정도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어차피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걸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거다. 하지만 나에게 그 '때'라는 것이 대체 언제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관리자가 된지 1년여 만에 나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구미에서 유명한 구인 구직 사이트에 지금까지의 내 경력을 자세히 기록한 이력서를 올렸다. 그리고 조금씩 이직 준비를 해나갔다. 가끔 이력서를 보고 연락이 오는 회사들이 있었지만 근무조건이나 연봉이 잘 맞지 않아 적당한 자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내가 너무 힘이 들어서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는 거지만 이미 높아진 내 연봉을 낮추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걸 느꼈다.


사장님과 나는 가끔 함께 다른 사업장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을 둘러보러 나가곤 했다. 특히 1 사업장 규격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보러 갈 때면 15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사장님과 함께 걸으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이직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장님과 함께 1 사업장으로 걸어가던 어느 날,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너 XX넷에 이력서 올려놨더라?"


사장님은 계속해서 연구소에 인력을 뽑아 공급을 해야 하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보니 적당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수시로 구인, 구직 사이트를 둘러보셨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사장님이 그렇게 내 이력서를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장님의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력서를 그렇게 화려하게 쓰면 오라는 곳이 잘 없을 거다."


거기서 내 이력서를 보고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끼셨을까?'라는 생각에 너무 죄송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아주 크게 꾸지람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도 더 이상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곤 좀 더 업무적으로 배려를 해주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직을 하게 되었다. 내 이력서를 보고 내 경력이 필요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이내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새로 면접을 본 그 중소기업의 환경이 너무 열악해 선뜻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이 스트레스와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직'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회사에 사직서를 냈을 때 연구소 관련부서에서는 사장님께 찾아와 나를 '그만두지 못하게 붙잡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회사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 기획부서 연구원은 사장님께 '몸값 좀 제대로 챙겨주면 안 그만둘 거라며, 사장님이 너무 많이 떼먹지 말라.'는 이야기까지도 했다.


우리 회사는 대기업의 사내 협력업체로 우리 직원들의 근태 표를 매달 그 대기업 담당자에게 보내면 인력당 급여가 계산되어서 사장님께 일괄 지급된다. 사원급과 관리자급에 정해진 기본 연봉이 있다. 사원급의 연봉은 크게 높지 않았지만 관리자급의 연봉은 그 대기업의 고졸과 대졸사원만큼 차이가 컸다. 하지만 내부 승진으로 관리자가 된 나에게는 사원 시절 받던 연봉에서 10% 남짓 인상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내가 이직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자리에서 원래 받아야 하는 연봉, 그 대기업에서 인정해주는 연봉을 알게 되니 너무 허탈해졌다. 그리고 잠시 그만큼의 연봉을 준다면 계속 다닐 수 있겠다며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이직을 했다.


가끔 사장님은 가끔 나에게 '대기업 부장(그룹장)이 나을 것 같냐? 협력업체 사장이 나을 것 같냐?'라는 질문을 하셨다. '그래도 갑인데 대기업 부장이 낫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면 '협력업체 사장이 훨씬 낫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래된 SUV를 타시던 사장님은 1년 만에 대형 승용차와 아주 비싼 SUV를 추가로 구매하셨다.


그리고 매일 야근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대기업 사원들과 달리 사장님은 매일 정시에 퇴근을 하셨고 휴일은 무조건 쉬셨다. 그런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사장님이 왜 '협력업체 사장이 낫다'고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암에 걸린 뒤에야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