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빠투툼 appatutum Feb 23. 2016

입사 6개월 만에 200여 개의 명함을 받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48] 멘땅에 헤딩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커피 한여름에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사장님과 첫 대면을 했다 


2006년 8월 7일. 내가 새로 입사한 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날이다. 다른 사원들도 모두  여름휴가를 보내고 첫 출근을 하던 날이기도 했다. 오전 9시. 늦은 출근시간을 자랑하던 그 회사에 출근을 해서 품질보증팀 과장님과 함께 대표이사실에 들어갔다.


마른 체형에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사장님은 나에게 이전 직장의 사장님 안부를 물으셨다. 내가 면접을 보고 2주간의 정리 기간을 달라고 했을 때 이전 직장의 사장님이 지금의 회사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한 달간의 여유 시간을 달라고 직접 요청을 했으니 나를 보는 순간 그 일이 제일 먼저 떠올랐을게 분명한 일이었다.


지금의 사장님과 이전 직장의 사장님은 같은 대기업 출신으로 근무했던 부서가 달라 자주 소통을 하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그 대기업을 나와 각자의 사업체를 꾸려 가는 중이다. 이전 직장의 사장님은 여전히 그 대기업 안에서 별도의 사업체를 운영하셨고 지금의 사장님은 이렇게 외부에 나와 새로운 사업체를 이끌고 계셨다.


지금은 나왔지만 여전히 그 대기업 '출신'답게 사장실 안에는 그 대기업 계열사 제품들이 가득했다. 또한 회사의 핵심 요직에 있는 사원들 역시 그 대기업 출신들이 많았다. 아주 비싸 보이는 어두운 고동색 소파에  앉아한 여름에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뼈를 묻어라'는 환영 인사와 함께 나는 그 회사의 일원이 됐다. 


내가 첫 출근을 한 그날, 나와 같은 부서에 함께 입사한 형이 있었다. 그 형과 나는 입사 전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던 경력을 인정받아 '주임 2 호봉'으로 입사를 했다. 고졸로 5년의 경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 품질보증팀의 막내로 있던 형님이 나와 같은 주임 2 호봉을 받고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더 많았다.


이 회사 역시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입사하기 전 내 연봉이 얼마고 내가 무슨 직급으로 입사하게 될지 전혀 정보를 주지 않았다. 단지 면접을 볼 때 '이전 직장에서 받고 있는 처우보다는 낫게 해주겠다'는 말만 들었다. 입사 후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강주임'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내가 주임 직급을 받은 것을 알게 됐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가 입사하기 전 나보다 10살이 더 많은 그 형님이 우리가 입사하면서 받는 처우에 대해서 아주 불편해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참이나 어린 친구들이 새로 입사를 하는데 이 회사에서 몇 년 동안이나 열심히 일해온 자신과 비교했을 때 더 좋은 처우를 받는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우리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처음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바리 해 하던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기 싫었을 것 같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식구들이 모여있는 중소기업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같은 부서의 우리들뿐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 형님도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친해지게 됐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수입검사' 담당이 되다


▲ 데이터 검사 이력과 공정 불량률 등 거래처 관리에 필요한 데이터들을 하나씩 모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담당 업무는 전 품목 부품 '수입검사'가 주 업무였다. 그리고 LCD 모니터용 보드를 만드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적게 나가는 아이템인 '파워 보드'의 고객 서비스를 담당했다. 또한 연구소에서 개발되어지는 '인버터'와 'LIPS'(LCD Inverter Power Supply - 인버터와 파워 보드를 하나의 보드에 결합시킨 제품)의 '인증시험' 역시 내가 담당했다. 


항상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서 수입검사와 인증시험이라는 업무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문제없는' 업무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하루 생산 물량 맞춰서 바이어 납기 맞추기에 바쁜데 '미래'에 투자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그저 그렇고 그런 멘토를 만났다면 그런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수입검사 업무를 할 때도 검사 없이 투입한 부품이 별  문제없는 경우가 많다.


기업을 운영함에 있어 수입검사는 사전에 불량품을 얼마나 검출해서 손실을 얼마나 줄이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업무를 시행함으로써 우리 회사와 거래하는 거래처들에게 우리 회사가 '만만한' 회사가 아님을 인식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가 있다. 나는 수입검사와 인증시험이 없는 우리 회사에 입사해서 1년 만에 모든 것을 바꿔놨다. 


우리 회사의 생산 라인은 '검사' 공정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 실질적인 생산은 외주 업체를 이용했다. 외주 업체는 우리 회사로 납품되어진 부품을 받아가서 임가공을 완료한 뒤 우리 회사 검사 라인으로 투입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검사 라인에는 '반장' 1명과 10여 명의 주부 사원이 '제조반'이라는 조직으로 근무를 했다.


나는 '품질관리'라는 직무에 있어 경력 사원이었지만 'LCD 보드'라는 제품에 있어서는 전혀 몰랐다. 물론 다른 제품들을 많이 만져 봤기 때문에 완전 신입사원들보다는 빨리 일을 배울 수 있었지만 처음 입사 후 한 달 동안은 모르는 제품들을 만지면서 씨름을 해야 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 수입검사를 담당하고 있던 10살 많은 형에게 업무를 배우며 인수인계를 받았다. 그 형이 알려준 수입검사 품목은 'PCB'와 '트랜스' 2개 품목이었다.


PCB와 트랜스는 우리 회사의 주력 제품인 인버터의 메인 부품이었다. 그 부품들을  수입검사한다고 했지만 검사를 위한 기준도 특성을 측정할 수 있는 장비도 회사에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 회사의 품질관리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을 하면서 한 달이 지났고 이제 수입검사라는 일은 오롯이 나에게 모두 돌아왔다.


거래처에서 납품된 부품들로 인해 공정에서 불량이 발생되면 그 업체에 전화를 걸어 '불량 나온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 회사 품질관리 활동의 전부였다. 그랬기에 그 어떤 서류도 근거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내가 수입검사를 담당하게 되면서 모든 기준과 절차를 새로 만들어 내야 했다. 그랬기에 힘이 들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고 그로 인해 나에게 '전권'이 주어지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마음껏 추진할 수 있었다.


귀찮았지만 우리 회사로 입고되는 PCB와 트랜스는 모두 다 샘플링 검사를 진행했다. 계측 장비가 없어 검사를 할 수 없는 항목은  건너뛰었고 확인 가능한 항목에 대해서는 꼼꼼히 검사를 했다. 그리고 검사 이력에 대해서 거래처 별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불량이 발생되면  디지털카메라로 불량품 사진을 찍었고 '불합격 통보서'양식을 만들어 거래처에 이메일을 보내 서류로 전달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런 피드백이 없었던 회사에서 갑자기 '수입검사 불합격'이라면서 연락이 오고 담당자를 호출하고 '재작업'을 요청이 들어오니 거래처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보낸 메일에 회신 조차도 없던 회사들이 실제로 납품한 물건의 '반품'까지 이뤄지니 놀라서 한두 명씩 회사로 뛰어들어왔다. 그렇게 그 회사들의 담당자들과 안면을 트기 시작했고 우리 회사에도 엄연히 '수입검사'가 있음을 인지시켰다.


부품의 수입검사를 진행하면서 우리 회사 보드를 임가공 납품하던 외주 업체의 생산성이 높아졌다. 외주 업체 관리자들은 내가 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생산 도중에 부품 불량으로 인해 공정에서 불량률이 높아지면 스스로 샘플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 활동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우리 회사 검사공정에서 검출되는 불량률도 낮아졌고 반사 이익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고객 납기를 맞추기 위해 급하게 잔업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우리 회사 생산 라인은 검사 공정만을 가지고 있다. 맨 마지막 공정에는 '생산 일보'가 있어서 모델별로 하루에 몇 개의 보드가  생산되었는지 기록되고 생산관리팀에 보고가 되어진다. 하지만 검사 공정임에도 '불량률'에 대한 집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부품의 수입검사 프로세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제조 반장님을 불러 '검사 일보'를 만들고 생산 라인에 비치해 작성토록 했다. 그 후 매일 아침 전날 기록된 검사 일보를 회수해서 전날 생산 도중에 발생된 불량 유형과 불량률을 집계해서 데이터화 시키기 시작했고 그 데이터를 근거로 임가공 업체들과 '주간 품질 회의'를 실시했다.


주간 품질 회의를 실시한다고 각 임가공 업체에 공문을 보냈다. 그러자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나는 그들의 생산성을 높여주기 위해 최고의 품질을 가진 부품들이 투입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준 뒤였기 때문에 우리 회사 검사공정에서 발생되는 불량품들은 임가공 업체의 검출 미스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주간 품질 회의가 끝나면  협의된 내용과 더불어 업체별 주간 불량 발생률 차트를 전체 임가공 업체와 더불어 구매전략팀 등 관련부서에 배포했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업체가 있으면 미참석 한 내용까지도 모두 공유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핑계를 대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업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매주 회의에 참석했다.


수입검사 담당자로 품질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하나하나 체계를 잡아나가다 보니 입사하고 새로 산 내 명함철에는 6개월 만에 200여 개의 명함이 모였다. 그리고 업계에서는 'XX회사 수입검사 빡세다'라는 소문이 났고 부품 업체들은 우리 회사로 납품하는 부품에 대해서 '한번 더 검사하고 보낸다'는게 철칙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다른 동료들보다 나은 처우를 받고 입사한 나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들도 6개월이 지나고 나니 거의 다 사라졌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하면서 없던 일이 생겨 더 피곤해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평소에 말 안 듣던 거래처들이 말을 잘 듣게 됐다'며 좋아했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고 꼼꼼해야 한다. 회의에서 한마디 하려면 일주일 이상의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노력은 하지 않고 결과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은 '원래' 그렇게 잘 돌아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다. 그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은 엄청난 노력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지금 내 주변 환경은 너무 열악하고 아무것도 없어서 절대로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누구든 처음 시작할 때는 '멘땅에 헤딩'으로 시작한다.  하나하나 큰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부지런히 그런 모습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끈기'가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파워보드 수리, '능력 있는' 사원이 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