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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Mar 23. 2016

'철새'로 산 시간이 내 역량을 높여주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52] 코스닥 상장기업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저녁형 인간 백수가 될떄마다 나는 저녁형 인간이 되었다 


중국 남경에 새로운 공장이 생기면서 한국에서 생산되던 제품들이 중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부품 업체들로 나가던 발주 물량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국내 생산 물량이 줄어든다는 것은 국내 부품 업체들과 외주업체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나의 일 또한 줄어듦을 의미한다. 물론 중국에서 생산된 완제품이 한국에 들어오면 수입검사를 해야 하지만 그 일은 우리 팀 내 각자 담당하는 파트에서 진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우리 팀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던 내가 어슬렁거리며 여유를 부리고 지내던 어느 날, 이사님이 나를 호출했다. 이사님은 나에게 중국 공장으로 생산지가 이전되면서 국내에 수입검사 업무가 줄어들었으니 제조반 운영에도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 공장에도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할 테니 언제든 나갈 준비를 하라는 말씀도 함께하셨다.


이사님은 내가 맡는 업무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좀 더 집중해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셨는데 나는 계속 그 말이 '너의 수명이 다했다'는 말로 들렸다. 당시 나의 성격상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했고 그 일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면 금세 질려 또 새로운 업무를 찾는 것을 즐겼다. 그런 내게 있어 당시는 '자리를 옮겨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항상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하던 나의 성격은 지금껏 내 역량을 높이는 데 있어 지대한 공을 세운 건 분명하지만 반대로 한 곳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성격은 산업기능요원 시절 TV 수리사가 되면서 시작됐다. 


처음 수리사가 되고 1년이 지나자 우리 회사에서 생산하던 TV 제품들의 불량품 수리 역량을 모두 숙달했다. 지난 1년간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스스로 경험을 통해 배운 기술이다. 이제는 웬만한 불량품들은 눈 감고도 수리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회사 내에서 '수리'만 놓고 보았을 때 내가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는 베테랑이 되어 수월하게 근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다면서 수리사를 그만두고 출하 검사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년 6개월 후 산업기능요원이 끝나고 새로운 직장에 취직했고 3개월 만에 회사의 '넘버 2' 자리에 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스타트업 기업을 자리 잡게 만들어 놓고 1년 1개월 뒤 나는 또 스스로 새로운 일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한 곳에 진득하니 붙어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철새'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나 역시도 스스로 선택한 철새였고 돌아보면 철새로 살아온 것이 나의 역량을 갈고닦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다양한 조직과 직무, 인생의 경험을 통해 지금은 웬만한 일에는 전혀 긴장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고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졌다.


또한 십수 년을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살아왔기에 남들처럼 익숙한 일을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덕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는 역량이 길러졌으며 스스로 '시간 관리'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 습관은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자산'이 되고 있다.


지금껏 내가 직장에서 담당해온 업무는 1년이면 대부분 마스터가 되는 일들이었다. 거기서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좀 더 깊은 노하우가 생길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봐온 선배들을 비춰볼 때 '익숙함'이라는 말속에 숨어 점점 도태되어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새로움을 찾아다녔다.


그 새로움에 대한 도전 정신이 이번에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직장 내에서 내가 1년 동안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며 만들어 놓은 '내 일'이 중국 공장이 생김으로 인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이 조직에 없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도전을 하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평소와 달리 다른 직장을 구해 놓지 않은 채 회사를 그만두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또 어떻게든 이직할 곳이 구해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통장에는 아껴 쓰면 석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조급하지도 않았다.


내가 회사를 나온 날은 여름이 시작되던 7월이었다. 지난해 여름휴가를 마치고 8월 첫 출근을 하던 날 '뼈를 묻으라'는 사장님의 말씀과 함께 입사를 했었는데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아 이렇게 다시 바깥에 나와 있다. 다시 말해 1년 만에 시장의 환경을 빠르게 변화했고 국내 생산 물량은 전부 중국 공장으로 넘어갔으며 그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나는 백수가 되면 항상 '저녁형 인간'으로 생활 패턴이 바뀐다.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새벽에 잠들어 오전 시간이 없는 삶을 산다. 백수일 때면 항상 그랬었고 이제는 직장인이 아닌 자영업자가 된 후에도 나는 남들보다 늦은 아침을 맞이한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저녁형 인간이 내 체질에 맞는데 직장생활을 해온 15년간을 억지로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왔다.


저녁형 인간의 삶에 익숙해져 있다가 새로운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가야 하는 날이면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항상 피곤한 상태로 면접을 보러 가야 했다. 그리고 백수에서 다시 직장인이 될 때면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거의 일주일 동안을 아침형 인간으로 '시차 적응'을 못한 채 피곤하게 살아야 했다.


매일 같이 구인 구직 사이트를 뒤졌지만 마음에 드는 회사가 없어서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백수가 되면 항상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마음과 달리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돈' 때문이다. 생활비는 점점 바닥이 나는데 직장이 없어 돈 나올 곳이 없으니 걱정이 점점 되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취직해도 2달째가 되어야 겨우 첫 달 치 월급을 받는다. 그리고 첫달치 월급은 한 달 만근에 대한 월급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회사에 취직해도 바로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걸 잘 알기에 아직 통장에 2개월 정도의 생활비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불안하고 초조해져 갔다.


최종면접에서 내 상대는 석사 출신의 재원


▲ 면접 석사 출신의 재원과 내가 최종 면접에서 만났다 


백수가 된 지 한 달이 갓 지났을 무렵 왜관 공단에 있다는 한 코스닥 상장기업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상장기업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다.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일한 게 대부분이었고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큰 기업에서 일도 해봤지만 상장을 한 기업은 아니었다. 그러다 코스닥 상장기업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으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상장기업이라면 당연히 비상장기업보다 복지나 급여조건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일반 기업들보다 훨씬 더 탄탄한 기업일 테고 대외적으로도 '이름값'이 있는 곳이라 회사에 대한 자부심도 느끼며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무조건 '상장기업은 좋은 회사'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방문한 회사의 모습은 그저 그랬다. 대기업 정도의 '삐까뻔쩍한' 회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일반적인 중소기업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중소기업들 중에 '너무 열악하지 않은 회사' 정도로 보였다.


그 회사는 LCD 패널에 들어가는 형광램프를 만드는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 만드는 형광램프는 전량 국내 모 대기업에 납품된다고 한다. 상장기업이라 자체 브랜드의 제품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회사도 그냥 그저 그런 대기업의 '하청업체'였다.


나의 생각과 달리 그 회사에 근무하는 관리자분들은 상장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보통 서류 전형 이후에 면접을 보고 나면 바로 합격 여부가 결정이 나던 다른 중소기업과 달리 여기는 면접을 3차까지나 진행했다. 그 덕에 구미에 있는 집에서 왜관공단까지 3번을 왔다 갔다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3번을 불러 면접을 봤으면 '면접비'로 교통비 정도는 챙겨줄 줄 알았는데 대기업을 흉내 내면서 3차 면접을 보던 그 회사는 면접비를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걸 보면 면접비가 없는 일반적인 중소기업보다 더 못한 회사의 이미지가 생겨났다.


1차 면접에서 해당 부서 관리자 면접을 보고 2차 면접에서 인사팀장 면접을 봤다. 그리고 마지막 면접은 왜관 공장의 책임자인 전무님의 면접을 봐야 했다. 면접이 점점 진행되면서 탈락자가 늘어났고 최종 1명을 뽑는 전형인데 나는 마지막까지 남게 됐다.


전무님 면접에서 나와 함께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은 1명이었다. 최종 2명 중에 1명이 최종 합격을 한다고 한다. 상대는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졸업을 하고 석사 과정을 마친 재원이었다. 반면 나는 고졸 학력이었고 나이가 상대보다 어렸지만 실무 경력은 상대보다 더 많았다.


최종 면접을 보고 며칠 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 석사 재원을 제치고 내가 최종 합격이 되었다고 했다. 내심 기대는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최종 합격을 했다고 하니 기분은 좋았다. 다만 걱정은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다뤄보지 않은 분야에서 새로 시작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여태껏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지만 큰 틀에서는 '회로'와 관련된 일들을 계속 해왔는데 이번엔 아예 다른 분야이기 때문에 응용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코스닥에 상장된 회사의 일원이 되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그다음 주 월요일 40분을 달려 회사에 도착했고 본관 2층에 있는 통합 사무실로 들어갔다. 통합 사무실은 회사의 모든 부서가 한꺼번에 사용하는 넓은 사무실이었다. 가장 안쪽에 품질보증팀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출근의 어색함을 짓누르며 한쪽 귀퉁이에 앉아하는 일 없이 웹 서핑하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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