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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투툼 appatutum Apr 14. 2016

어머니와 한집에 있는데 왜 불편할까

[나는 고졸사원이다 54] 향수병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 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 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 이사 준비 집으로 내려가기 위해 옷가지와 식기들을 박스에 포장해서 택배로 보낼 준비를 했다 


지난 2007년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기대하지 않았던 대기업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면접을 보러 경남 김해에 내려갈 때에도 어머니께 왔다 간다는 말도 못 하고 올라왔는데 최종 합격하고 집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전해드리니 너무 좋아하셨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구미 생활에 적응을 하고 살아온지라 다시 집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조금은 걱정도 됐다.


합격 통보를 받고 며칠이 지나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그 대기업 인사시스템에서 보내진 서류전형 불합격 통보 메일이었다. 나는 면접까지 보고 최종 합격 전화까지 받았는데 이게 뭔가 싶어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받은 메일은 무시하면 된다고 했다. 이때부터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일주일이 넘게 지났는데 언제부터 출근하라는 말이 없었다. 입사 예정일자가 나와야 그에 맞춰서 살고 있는 원룸을 빼고 집으로 이사를 할 텐데 연락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인사시스템에서 날아온 서류전형 불합격 메일 때문인지 혹시라도 입사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집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답답한 2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참다못해 다시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입사 예정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나는 타 지역에 살고 있고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에 꼭 미리 입사 예정일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전화를 걸어 확인한 그제야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입사 통보에 난감했다. 그리곤 이내 정신 차리고 이사 준비를 했다. 원룸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옵션'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가야 할 짐들은 식기들과 옷가지, 컴퓨터가 전부였다. 조그만 원룸 안에 짐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하나하나 짐을 싸다 보니 그 양은 엄청났다.


이사 준비를 하기 위해 이전 직장에서 거래하던 박스 회사 부장님께 전화를 걸어 종이박스를 좀 달라고 부탁했다. 부장님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지만 같은 고향에서 올라온 동생이라고 잘 대해주셨다. 그렇게 종이박스 몇 개를 얻어 짐을 쌌다.


짐을 다 싸놓고 보니 내 조그만 승용차에는 다 실을 수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그렇다고 이삿짐센터를 부를 정도의 양도 아니었기에 택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컴퓨터와 몇 가지 귀중품은 내가 직접 챙기고 나머지 옷가지들과 식기들은 택배를 이용해 집으로 발송했다. 택배를 보내고 내가 집에 내려가 있으면 다음날 짐이 도착하기 때문에 혼자 살던 내가 이사하기에는 딱 좋은 방법이었다.


정들었던 내 방을 나와서 집으로 내려가는 길. 매번 오가던 길이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복받쳤다. 지난 몇 년간 살아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내 감정선을 건드렸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또 행복한 일도 많았던 곳. 많은 추억과 친구들을 남겨둔 채 이제는 내 고향과도 같은 이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집에 도착하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머니는 늦둥이 막내아들이 몇 년 만에 다시 집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너무 좋아하셨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았지만 오랜 세월과 함께 어색해져 버린 우리 집과 내 방이 낯설어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 집은 내가 구미로 올라갈 때 살던 집이 아니라 중간에 이사를 한 집이라 그런지 더욱 그랬다.


가져온 짐을 풀기 위해 내 방으로 들어갔다. 몇 달에 한 번씩 집에 내려올 때면 침대에서 잠만 자고 다시 올라가곤 했던 방이다. 이제야 제대로 돌아본 내 방은 아직도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쓰던 방 그대로였다. 내가 지방으로 올라가고 나서 이 방의 세월은 멈춘 것이었다. 그런 방을 어머니는 매일 쓸고 닦고 하셨던 거다.


구미에서 택배로 보낸 물건들이 집에 도착했다. 짐들을 풀고 방을 내가 지내기 좋은 상태로 만드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렇게 6년간 멈췄던 내 방의 시간은 다시 흘러가게 되었고 어머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동안 텅 빈 집안에서 외롭게 혼자 지내셨을 어머니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족이지만 몇 년 동안을 혼자 살다가 누군가와 한 집에서 함께 지낸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어색했다기보다는 불편했던 것 같다. 거기다 한동안 구미에 대한 향수병까지 걸려서 몇 달을 고생했다.


부산이 고향이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김해로 이사를 오게 됐다. 김해에서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 생활권이 항상 부산에 있었다. 그러다 지방으로 취업을 나갔기에 김해는 내게 있어 연고가 없는 동네였다. 그런 상태에서 집에 내려와 김해에서 살게 됐으니 혼자 살다 어머니랑 함께 사는 것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서 사는 것도 모두 힘들었던 것 같다.


구미에 대한 향수병으로 거의 한 달에 2번 정도는 주말마다 구미에 올라가 친구들을 만났다. 고속도로를 달려 구미 근처에 다다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갔다가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향수병을 극복해야 하는데 지독하게도 그 병은 몇 달 동안 계속됐다.


출근시간 6시 30분... 방송국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 사무실 새로 입사한 대기업의 사무실은 그전에 근무하던 중소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인테리어 상태부터가 남다르게 좋았다. 


새로 입사하게 된 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날. 출근 시간을 잘못 알아서 아침부터 엉망진창이 되었다. 6시 반까지 출근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방송국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새벽부터 출근을 했다. 하지만 당연히 사무실은 텅 빈 상태로 문이 잠겨 있었고 인사담당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건물 지하에 있는 빌딩 주차장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인사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제야 6시 반이 아니라 8시 반까지 출근이라는 걸 알았다. 결국 방송국도 일반 회사와 다를 게 없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친해진 그 인사담당자와 두고두고 곱씹으며 술자리에서 회자되곤 했다.


입사 후 일주일간은 OJT(On the Job Training) 기간이다. 면접을 보던 대회의실에서 일주일 간 회사에 대한 정보와 복리후생, 각 부서별 역할 등을 배웠다. 입사 첫날 회의실에는 나를 포함해 총 5명의 신입 사원들이 함께했다.


신입사원 5명은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입사를 했다. 첫날부터 아주 가까워 보이는 2명은 그룹 공채로 입사해 몇 달간 그룹에서 하는 연수기간을 거치고 김해로 발령을 받아온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2명은 '6개월 계약직'으로 나와 같은 팀에 입사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김해 지역사에서 직접 뽑은 고졸 신입사원이었다. 당시에는 그룹 공채가 뭔지 몰랐고 그들과 나의 차이가 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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