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장에게 바치는 유쾌하고도 기괴한 헌사

Review No. 04 <어쩔수가없다>

by Kevin Lee



서론


제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만 5번 봤습니다. 우선, 오랜만에 볼 만한 영화가 나왔다는 점도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관객에게 불쾌감을 남깁니다. 오프닝의 쨍쨍한 만수 집의 마당과 대비되는 엔딩의 비 오는 마당, 초반부와 달리 이제는 기계들로 가득찬 공장에서 홀로 기계들을 관리하는 그의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했었던 기억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재밌게 봤던 영화이고, 많은 혹평이 있었지만 이 영화는 느린 템포의 영화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정말 재밌게 관람하실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그리고 리뷰가 상당히 깁니다. 나눠서 올릴 걸 그랬나.. 조금 감수하고 재미있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view No. 4 / 어쩔수가없다


1. " 혐오시대"의 도입, 이것의 뿌리는 어디?


이 사진이 익숙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이 사진은 1997년 IMF 사태 (이하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났을 때 찍힌 사진으로, 사실 저처럼 현대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을 그저 금융 위기 정도로 치부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을 또 다시 증명해낸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1997년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이 하나로 다시 뭉치던 뜨거운 시절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상당히 변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의 함성을 지나 2010년 연평도에서의 포격 소리를 지나자 닥쳐온 2016년의 국정농단 사건과 2020년의 팬데믹은 사람들을 서로를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불신하게 만들었죠.

그리고 저는 지난번에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다 좀 특이한 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노조의 조합원이 백화점에서 자신의 의복만으로 민원을 받아 퇴장조치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그 점에 집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점에 집중하면 리뷰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제 리뷰는 현대사를 다루게 된대도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기 때문이죠. 제가 집중하고 싶은 점은 그들이 나눈 대화입니다.


노조 A씨: 노동자가 누구를 혐오한다는 거에요, 이게?

직원 A씨: 저도 노동자입니다.

직원 B씨: 노동자도 노동자를 혐오할 수 있어요.


참으로 특이하죠? 노동자가 노동자를 혐오할 수 있다는 말이 왜 이렇게 잔인하게 들리나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제가 흑백논리에 갇혀 살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아직 세상을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보는 아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 "정"이란 것이 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막상 어떤 뉴스 기사 하나의 댓글창만을 봐도, "님 우파임?" 아니면 "님 좌파임?"이란 말부터 온갖 욕이 난무하는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죠. 이건 절대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202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더 심해진 세대의 격차와 개인주의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보고 온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그 점을 정확히 찌른 영화입니다. 혐오의 시대에 들어선 한국, 그리고 해고당한 가장이 자신이 느끼는 혐오 속에서 기괴하고 잔혹하게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다룬 영화입니다. 줄거리부터 소개하죠.


2. 어쩔수가없다


25년간 태양에 근무하신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5년, 그 긴 세월 동안 유만수는 중학생 아들 시원, 자폐가 있는 어린 첼로 천재 리원. 그리고 테니스가 취미인 자신의 아내 미리와 강아지 두 마리를 먹여살리기 위해 힘들게 제지 공장에서 일해왔죠. 볕이 잘 드는 저택 아래서 회사에서 보내 준 장어를 구워먹으며 여섯 가족이 모여 포옹을 나누는 것도 잠시, 해고당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회사에 어떻게든 항의하려지만, 그걸 실패하고 보낸 시간만 13개월. 그는 어떻게든 재취업을 하려 했지만, 횡설수설하며 면접에 누누이 떨어지게 됩니다. 긴축 재정을 하며, 두 강아지 마저 떠나보내자 더욱 음울해진 집안 분위기 속,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서 노획해온 M1900을 액자에서 꺼내곤 자신보다 나은 경력의 지원자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며 거짓 구인 공고를 잡지에 기재합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나은 경력의 3명, 범모, 시조, 선출을 추려내고, 그들을 처리할 준비를 합니다. 의도치 않게 범모의 아내에 의해서 끝난 첫 번째 살인,

그리고 탄피를 흘리는 실수를 저지른 두 번째 살인, 죽일 필요가 없었는데도 저지른 세 번째 살인이 끝난 후에 만수는 결국 회사에 채용됩니다. 그렇지만 그가 맡는 직무는 "인공지능 소등 시스템 관리자" 즉, 인력이 감축된 공장 속에서 감축된 인력의 자리를 밝고 올라선 만수는 여섯 가족과 함께였지만 선뜻 달라져 있었습니다.



3. 다 이루었다, 유만수의 죽음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요한복음 19:30

이건 예수가 십자가형에 당하며 죽을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록한 요한복음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만수의 대사 "다 이루었다" 와도 정확히 일치하죠.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이 영화에서는 사과와 뱀 등 성서적인 은유가 등장한다는 점은 알겠지만, 그럼 왜 예수가 죽을 때 했었던 말을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도입부에서 인용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관리직 유만수의 죽음. 해고자 명단을 작성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죽어버린, 직원들을 사랑하는 관리직으로서의 만수이자 후에 일어나는 그의 불행을 의도적으로 은유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양에서 불행하다 느끼는 숫자로는 13이 있는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만수의 퇴직금이 바닥나기 시작하는 13개월차부터 그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3개월 내 재취업이라는 말과는 달리, 이제는 아무 곳이나 전전하며 면접을 볼 준비를 하고 다니는 한 마디로 백수 신세인 사람이죠. 이제는 집까지 내놓아야 될 상황에서, 그는 재취업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앞서 설명해드린 줄거리처럼, 그는 살인을 결심하죠. 그가 살인을 결심하는 장면은 영화는 절대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온 힘을 다해서 묘사하는 듯 하기도 합니다.

고추화분에서 배설하듯 새는 누런 물을 맞으며 살인을 결심하는 만수는, 소변을 맞고 그런 결심을 하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누군가의 찌꺼기, 즉 배설물을 맞으면서 그는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꿈을 꿉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에서 늘상 강조되는 "더러운 것 위에 새로운 것이 자란다" 라는 대사와 연결되죠.

"(휴대전화들이 묻힌 땅을 가리키며).. 똥 오줌 갖고 거름 만드는거 알지? 더러운 것 위에서 맛있는 게 자란다, 이거야. 사과 열리면 쨈 만들어 먹자. - <어쩔수가없다> 각본, pg. 135 中" 만수는 마지막에 선출을 죽이게 될 때 자신의 썩은 치아를 뽑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전에 등장했던 것들과는 확연히 성격이 다릅니다. 그의 더러운 치아가 뽑힌다고 해서, 새로운 치아가 돋아나진 않죠. 그의 논리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영화는 그의 논리를 이렇게 부정할까요?


3. 어쩔수가없..나?

사실 이 영화는 완벽한 판타지입니다. 현실이었다면 아마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기도 전에 잡혔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 코미디로,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지는게 당연하죠. 그런데도 개연성이 없다면서 비판하시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과연, 거장이라고 불리는 박찬욱 감독이 과연 그것을 몰랐을까요?

평생을 영화에 바쳐온 박찬욱 감독이 과연 그 정도를 몰랐을까요? 아마 충분히 인지하던 부분일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각본가만 박찬욱 감독 자신을 포함해서 4명입니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이 영화는 개연성보단 관객과 유만수의 거리를 넓히는 데 뒀습니다. 그가 공감되지 못하는 이유도, 그는 제지에 집착하고 그것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내용 때문이죠. 사실 다른 직업을 얻어도 되거든요.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 자라면 공사 노동자가 되기라도 해야할 판이죠.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모두 세 남자는 비슷합니다. 딸이 있는 고시조도 자신의 삶에 만족한 듯 보이지만 그는 제지업계로 복귀하기를 원하는 자들이죠. 범모는 만수와 스쳐지나가는 영화 초반부에 주문을 외우듯 "난 남자다"를 반복합니다. "난 할 수 있다"도 아니고.. "난 남자다"라니.. 그리고 또한 만수의 친구이자 그의 집을 사려고 시도했던 친구 원노가 만수에게, "유 얼 Man수. 화이팅!" 이라며 조롱하던 것도 참 이상하죠.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남성을 자주 언급합니다. 범모는 아라의 아버지가 제안하는 음악 카페는 범모가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제지 업계에 복귀한다고 해도 범모는 곧 정년이고, 은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범모는 제지업계에 꼭 있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죠. 과연 범모만 그럴까요? 그에게 공감하는 만수, 그리고 시조와 선출 모두 제지업계로 복귀하길 원합니다. 선출 역시 혼자 사는 것이 최고라는 등 쿨한 모습을 보이지만 영화 후반부 만수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이 영화에서 실직은 "남성성의 거세"입니다.

사실 이런 점이 <브레이킹 배드>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졌어요. 여기서 등장하는 암환자 고등학교 화학교사 월터 화이트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마약을 제조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시즌 5에서 드러나는 그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4. I did it for me


나를 위해서 저지른 일이라는 월터 화이트의 고백이죠.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유만수도 똑같습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건 후에 매니저 자리를 구해보겠다는 선출에게 조용히 중얼거리는 만수가 직접 이야기하죠. "아- 이거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안 하면 앞의 두 사람 죽음을 헛되게 하는 거잖아. 개죽음 안 만들려면 어쩔 수가 없잖아. -어쩔수가없다 각본, pg. 156中" 사실 그는 선출을 죽이지 않아도 됐습니다. 선출과 친해진 그는 얼마든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총의 남은 장탄수가 증명해주기도 하죠. 작중 만수가 사용한 M1900 권총은 7발의 장탄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권총의 장탄수를 세어 본 결과, 시조를 죽였을 때는 남은 총알이 단 1발로, 충분히 선출을 권총으로 쏴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더 이상 권총을 집행의 장치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권총을 숨기고 더욱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죠. 그리고 선출은 술에 취한 만수에 의해 고기와 술로 질식사하죠. 술과 고기가 상류 계급의 주식으로 알려졌던 점을 감안하면, 큰 저택에 살며 시가와 위스키를 마시는 등 고급 취미를 즐기는 선출이 맞이한 죽음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수가 모든 일을 끝내고 집을 돌아왔을 때, 연출은 행복한 가정을 보여주는 초입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댄스를 하는 미리도 없고, 서로 뭉친 가정도 없습니다.

영화 초반부, 모두 서로를 껴안고 있던 그들은 이제 마당에서 서로 흩어진 채로 있죠. 그리고 시투와 리투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사과나무 밑을 파보려는 시도마저 합니다. 영화 후반부의 마당은 전체적으로 칙칙하고 메마른 분위기에 어수선합니다. 만수가 만약 다른 일을 구했다면 이 행복한 가정은 유지됐을 것입니다. 만수는 애써 "어쩔수가없었다"며 부정해보지만, 가족의 비극을 초래한 건 결국 실직도, 늦어진 재취업도 아닌 그였습니다.


5. 거름이 된 고시조, 아이폰, 그리고 돼지


영화에서 이런 언급이 나옵니다. 만수의 아버지는 이만 마리의 돼지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자 그것들을 모두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고, 그 후에 자살했다는 것이죠. 만수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것은 제가 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이 부분에서 집중해야하는 것은 시원이 돈을 벌기 위해 훔친 아이폰들을 나무 밑에 모두 묻었다는 것과, 고시조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이폰과 고시조, 아들과 아버지의 과오 위에는 나무가 심어졌습니다. 사실 핸드폰 몇십 대 위에서 나무가 뿌리를 잘 내릴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도 나오는 말이죠. 리원이 되뇌이는 "벌레가 끓어서 다 죽어가더라"라는 말은 고시조가 묻혀있는 땅 위에 심긴 나무가 잘 자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영화가 강조했던 "더러운 것 위에 새로운 것이 자란다"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들의 과오 위에는 잘 자라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세대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지는 만수의 과오에 대한 결과는 나무가 썩는다는 결과로 조금 빠르게 나타났을 뿐이지, 절대 시원의 과오가 묻힌 나무라고 잘 자라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소름돋는 사실은 그의 집이 3대의 과오가 묻은 집이라는 사실이죠. 3대는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회피했습니다. 돼지 이만 마리를 죽인 만수의 부는 창고에서 목을 매달았고, 만수는 아들의 과오를 훈계한다기보단 그의 친구 잘못으로 뒤집어씌우며 아이폰을 모두 묻어버렸죠. 그리고 만수 자신도 그의 과오를 집에 묻어버립니다. 만수의 문제 해결 방식을 보며 자란 시원이 어떻게 클 지는 이 영화가 모두 설명해줍니다. 시원은 결국 그처럼 문제를 회피하려고 시도할 것이고, 3대를 넘어 과오가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점들을 영화 곳곳에 숨겨둡니다. 이 숨겨진 것들을 발견한 관객들이 퍼즐을 맞추었을 때 이 가족의 미래까지 예측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만듦새는 굉장히 훌륭합니다.


6. 리원, 그녀는 누구인가?


저는 이 영화의 원작소설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액스>를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이 가장 도드라지는 건 영화에선 만수의 딸인 리원이 나오지만 <액스>에선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영화에서 리원은 자폐가 있는 아이로 나옵니다. 만수가 시조에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그녀는 누군가가 하는 말의 메아리, 즉 누군가의 말을 따라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그녀와 부모인 만수와 미리가 소통할 방법은 첼로밖에 없죠. 그런데, 영화의 초반부를 보시면 나오다시피 미리는 첼로 방송을 보려고 하는 미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 물론 눈건강에 좋지 않기에 표면적으로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리원이 갈망하는 것과 거리를 넓히는 미리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도 리원이 AI를 은유한 것이라는 말도 있더군요. 그렇지만 저는 리원이 만수를 더욱 빛내는 장치라고 생각했어요. "빛내다"라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리원은 영화 후반부에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악보가 완성되었을 때, 그녀는 부모 앞에서가 아닌 강아지 두 마리인 시투와 리투 앞에서 연주합니다. 그리고 만수는 그것을 무시한다는 듯이 공장에서 이어플러그를 낍니다. 결국 만수는 리원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뿌리칩니다. 리원은 현대에 단절된 부모와 자식의 단절된 소통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리원이 첼로를 하고 싶은지도 불분명합니다. 리원이 잘하는 것이 첼로이지, 좋아하는 게 첼로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죠.


7. 박찬욱과 히치콕: 미학의 정점

(이 문단에서는 이 영화의 촬영에 대한 저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조사를 하기야 하지만.. 당연히 저는 비전문가고, 영화 문법을 배운 사람도 아니기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기에 그냥 편하게 보셨으면 합니다. 이 문단을 보기 싫으시면 건너뛰셔도 됩니다.)


이 영화의 촬영은 굉장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실 때 인물과 배경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받으셨을수도 있는데, 이 영화가 광각렌즈로 찍은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돌리 줌 (Dolly zoom)이란 촬영기법을 생각하셨을 수도 있으셨겠지만, 돌리 줌은 공간의 왜곡은 일어나지 않으면서 입체감을 줄 수 있는 기법이죠. 영화에 관하여 조사할 때, 이 영화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연출과 촬영 기법을 상당히 많이 차용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는 과격하고 빠른 줌 인등을 사용하여 내가 고전 영화를 보고 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Alfred Hitchcock - Vertigo (현기증, 1958)

이 영화는 공간감을 중시한 영화입니다. 인물을 중시하지만서도 이 영화는 대부분의 쇼트에서 살짝의 공간을 남겨두는 편입니다. 인물을 꽉 채우진 않습니다. 냉정하지만 기계처럼 바라보는 시선은 아닌 것이죠. 이 영화는 충분히 인간적인 영화입니다. 그렇지만 영화가 인물에 삶에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관객과의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죠. 가장 많이 비교되는 영화인 <기생충>과는 또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생충>은 촬영도 굉장히 정교하지만 색감과 대칭적인 구도, 그리고 최소화된 왜곡으로 세계가 안정되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게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박 사장의 집이죠.

중앙부에 배치된 인물, 따뜻한 색감과 최소화된 왜곡, 대칭되고 안정된 느낌을 줌. 봉준호 - 기생충 (2019)

그렇지만 <어쩔수가없다>는 정반대입니다. 이 세계와의 몰입을 최소화하는 광각 렌즈의 왜곡을 사용했죠. 배럴 디스토션 (Barrel Distortion)이라고 부르는, 인물의 배경이 볼록하게 보이는 왜곡입니다. 잘못 찍으면 배경이 너저분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Stanley Kubrick - 2001: A Space Odyssey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

이처럼 비현실적인 공간감과 입체감을 주는데 특화되어 오랫동안 애용받은 촬영 기법입니다. 그리고 이번 <어쩔수가없다>에서 이런 비현실감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관객과 만수의 거리를 두는 데 사용했죠. 사실 이 영화는 굉장히 치밀히 설계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만수에게 이입하지 못했던 이유, 이러한 촬영 떄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광각 렌즈의 왜곡을 보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수를 선인으로 비추지도 않고, 오히려 폭력적인 줌 인과 줌 아웃, 인물을 작고 공간을 커다랗게 보이게 하는 압도감으로 현실과의 거리를 넓혀 나갑니다. 여러분의 불편감, 이 곳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찬욱 - 어쩔수가없다 (2025)

또한 이 장면도 굉장히 인상깊었어요. 사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무방한데, 가수 조용필 씨의 고추잠자리가 흘러나오며 만수가 범모를 살해하려 시도하는 쇼트입니다. 이 쇼트가 가장 "히치콕스러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이 씬에서 영화는 똑같은 사건을 여러 시점에 걸쳐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만수 - 범모를 한 쇼트에 동시에 등장시키고, 만수 뒤에 선 아라를 비추며 카메라는 줌아웃합니다. 그래서 범모를 죽이려는 만수의 시도를 "아라 -> 만수 -> 범모" 순으로 또 다시 비춥니다. 인물의 동작은 정지되어있고, 살인 직전이라는 급박한 순간을 최대한 정적이고 정렬적으로 다룹니다. 만수의 첫 살인이라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스펙타클을 정돈되고 깔끔한 구도로 바라보는 것이죠. 이 세계는 우리 세계와 닮았지만, 비현실적입니다. 예를 들면 영화 초반부 만수의 마당은 낙원같은 느낌을 줍니다. 원근감이 과장되어 공간의 압도감이 생겼습니다만, 인물이 중앙에 있고 가족끼리 포옹하는 장면은 평화로운 느낌을 주며 서로 다른 두 느낌이 충돌하며 비현실적인 경험이 강조되죠. 이 영화는 카메라마저 세계관을 형성하는 용도로 사용함으로서, 관객에게 불쾌감을 극대화시켜 전달합니다.


8. 총평

이 영화는 2025년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지능적입니다. 물론 <부고니아>나 <그저 사고였을 뿐> 혹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등등이 있겠지만 저는 이 영화를 가장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고전적이면서도 투박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박찬욱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액스>, 그리고 이 영화의 절제는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진 몰라도 마지막 선출을 죽일 때 만수의 광기어린 행동과 둘이 마시는 양주의 화끈거림과 대비되어 가장 큰 아이러니를 선사합니다. 나무에 둘러싸인 자신의 분재를 키우는 온실에서 욕망을 마구 표출하는 만수는 동시에 목재 가구들로 둘러싸인 선출의 집에서 금기를 깨고 자신의 욕망을 살인이라는 방식으로 해소합니다. 그로테스크하지만 우아합니다. 우아한 동시에 투박합니다. 이 감정의 균형을 가장 잘 잡는 감독은 박찬욱 감독밖에 없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AI 자동화 사회가 덮쳐오며 어쩌면 가장 빠르게 대체될지도 모르는 제지업계의 인간 유만수를 <헤어질 결심>과는 달리 차갑지만 따뜻한 마치 AI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 영화는 "걸어"나갑니다.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싸움을, 높이서도 바라보지 않고 아래에서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그저 저희는 그들의 싸움을 묵묵히 바라보며 관찰할 뿐입니다. 고시조를 죽일 때는 어떠한 드라마도 없습니다. 만수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변명"과 "딸을 사랑하며 평범하고 성실히 살고 싶었던 모습" 그리고 "성공한 자의 표상"을 죽이고 나서야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사라집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고 가공합니다. 마치 분재나무를 철사로 감아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완성시키듯이, 그는 문 제지에 입사하기 위해 그의 여러 내면을 죽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AI 자동화 사회에서 저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상류계급과 부자들도 아닌, 저희 자신일 것이라는 박찬욱 감독의 씁쓸하고도 잔인한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깎아내고 묶어놓아 만들어진 통제된 멋을 보십시오, 정말로 아름다운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쩔수가없다 (9/10)

그로테스크함으로 아름답게 깎아낸 2020년에 대한 멋들어진 우화.


나는 전문가야..! 기술자..!


감사합니다, Kevin Lee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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