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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D Oct 12. 2024

삼십 대 중반에 결혼한 이유

「일 중독자의 소도시 결혼유학」 중

동생이 태어난 여덟 살 겨울부터 지금까지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너는 알아서 잘하니까 걱정이 안 돼.'

분명히 응원이라 고맙긴 하지만, 듣는 당사자가 선정한 평생 가장 사양하고 싶은 말 1위로 등극했기도 하다. 나는 저 '알아서'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골라도 꼭 어려운 길 위주로 골라서 찾아갔고, 인생 선배의 보호가 늘 간절했다. 그렇게 부모님께 비혼을 외치기도 하고 딩크 Double Income, No Kids 맞벌이 무자녀 를 고려하기도 하다가 마음 다잡고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 결혼했다. 가까운 미래에 부모가 될 계획도 생겼다. 살면서 결혼 한 번은 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이 수줍은 이야기를 읽고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십 대 초반에만 해도 부모님처럼, 사촌 언니처럼, 그리고 소꿉친구였던 누구처럼 대학교를 다니면서 또는 졸업하면서 하는 결혼이 여느 업적보다 우월해 보였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었다고 여전히 말씀하신다. 실제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부모들이 방문하면 우리 엄마가 가장 어리고 예뻤던 기억이 선명하고, 아빠는 내가 중학생이 돼도 운동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공놀이를 했다. 내가 이십 대에 집을 떠나 스스로 장래를 만들어갈 때 두 분은 한참 활발한 사십 대를 보내셨고, 엄마와 나는 친구처럼 분위기 좋은 카페나 맛집을 찾아다닌다. 대학교 교수님께서 대학원 진학을 지원해 주시겠다고 제안하셨을 때 '그럼 결혼은 언제 해요?'라는, 지금 생각하면 어디에라도 숨고 싶은 발언을 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하루라도 이른 결혼이 곧 행복인 줄 알았다.


어른들이 소위 '좋을 때다'라고 말하고 무엇보다 내가 기다리던 이십 대는 밀림의 한가운데에서 시작됐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의문 가진 적 없이 어중간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내 일상은 당신보다 나를 더 아끼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폭삭 무너졌다. 부모님과 같이 크면 재미있는 대신에 모든 감정의 무게를 각자 감당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마흔에 엄마를 잃은 우리 엄마는 슬픔과 두려움이 누구보다 컸을 테니 옆에서 같이 우는 딸을 상상도 못 하셨을 것이다. 반대로 나도 엄마를 헤아리기에 그릇이 턱없이 작았다. 나는 방향 감각을 잃은 상태로 이십 대를 맞았다.


억지로 대학생이 되어서는 적성을 찾겠다면서 어학연수를 결심했고 부모님께서는 내 선택을 반대하셨다. 부모님 지원을 못 받게 된 상황에서 나는 마치 누군가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틈틈이 시간제로 일하고 받은 급여 이백만 원과 왕복 항공권만 들고 비행기에 탔다. 스물한 살 화초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확실한 건 나는 출국 전날까지도 행여나 비행기가 지구 반대편으로 날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덜덜 떨었다. 이십 대는 결국 연약했다. 특히 의지가 얼마나 약했는지 부모님의 꾸준한 반대에 귀국하고 동생의 미래를 지원하다가 이십 대 중후반을 넘겼다. 하고 싶은 일은 아니어도 할 만한 일 중에서 수입이 가장 높은 강의를 선택해 텅 빈 시간을 보냈다. 나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고 방황하는 동안 이십 대에서 결혼은 잠에서 깨면 깊은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꿈이 되었다.


서른 살이 되자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하겠다고 취직 준비를 했다. 이십 대에 한 번 큰 기업을 차고 나온 대가인지 서류 합격 비율이 1/10로 줄어서 매번 충격이었다. 그래도 이십 대에 방황하면서 남긴 값진 교훈을 새겼다.

'무언가를 해내기 전까지 세상은 날 으레 반대하니 될 때까지 하자.'

나는 주변에서 늦었다고 할 때 그렇지 않다고 굳게 믿고 반년 만에 신입사원이 됐다. 다만, 회사원이 되면 연애도 결혼도 잘할 줄 알았더니 일이 재미있어지는 바람에 이 시기에 처음으로 결혼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래 고민은 삼십 대가 되어서도 멈출 수 없었고, 밤 잠 줄여가면서 경력을 쌓는 동안 시간은 무심히도 흘렀다. 이십 대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게 빠른 흐름이라 몇 년 동안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대기업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제안한 연봉이 수락될 정도로 경험을 쌓았을 즈음 결혼을 결심했다. 일상에 큰 변화 없이 하는 결혼이 아닌 잘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연고 없는 소도시로 유학을 떠나는 상황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면 결혼 시점이 이럴 수 있는지, 눈물과 땀으로 이룬 커리어가 아깝지는 않은지 물었다. 맞다. 안 그래도 머리카락을 뜯으면서 고민하는 시기가 한두 달 있었고, 답을 알려줄 것 같은 책 찾아 읽기, 유튜브 영상 백 편 넘게 찾아보기, 결혼과 관련된 강의 찾아다니기, 주변에서 조언 듣기를 했다.


정보가 늘어갈수록 시선은 외부 환경에서 나 자신으로 이동했다. 결혼 전에 정말 판단할 문제는 지금부터 내가 안 가 본 길을 선택해서 행복한 일이 대부분이겠지만, 만약 예상치 못하게 수십 번 넘어지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혼자였다면 받지 않을 상처를 받아도 남 탓 안 하고 일어설 수 있을지였다. 혼자 아무리 잘 살았어도 결혼 후에는 새로운 성장이 시작되기 때문에 무언가를 잘 하겠다는 자신보다는 힘들 때 스스로 일어설 의지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일에 쏟던 정성을 결혼이라는 일에 잠시 쏟아도 생각보다 큰일은 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추려졌다. 아직 결혼할 시기가 아니라던 그럴듯한 핑계들의 중심에는 마음 흐리멍덩한 내가 있었다.


지금도 친구들은 가끔 '너는 역시 알아서 잘하는구나.'를 날리는데, 드디어 한결 듣기 편해진 나 자신이 대견하다. 그리고 이제는 나만의 짝꿍과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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