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TV에 환호하는 이유

조건이 명확할때 브랜드는 힘을 갖는다

by 허재영

아이들은 TV를 볼 기회가 없다. 집에서 거의 틀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정말 피곤한 하루를 보냈거나, 나와 와이프에게 남은 에너지가 0에 가까울 때에만 “오늘만 정말 특별하게, 어떤 이유 때문에 틀어줄게, 뭐 볼까?” 하고 말을 꺼낸다. 기회가 워낙 적다보니 TV를 보자고 하면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폴짝폴짝 뛰며 콩순이, 리틀엔젤, 신데렐라, 인어공주, 라푼젤… 알고있는 모든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외치기 시작한다.


TV시청 시간을 일부러 희소하고 소중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아이의 성장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니 자주 틀지 않았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TV 시청은 의도치 않았지만 굉장히 희소하고 귀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은근히 아이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제한적 조건의 힘.


조건의 제약은 특별함을 낳는다. 그래서 특정 조건에서만 쓰이는 브랜드는 특별함을 얻는다. 하지만 특별함을 획득한 브랜드는 대체로 범용화 되며 특별함을 잃는다. 안타깝지만 많은 브랜드들이 그런 수순을 밟는다. 실적 중심의 KPI 속에서 조직의 논리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1412638_20210512150627_879_0001.jpg Design으로 특별함을 획득한 비스포크

삼성의 비스포크는 출발선이 명확한 브랜드였다. 색상 자체가 메시지였고, 가전을 고른다는 느낌보다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했다. 하나의 디자인 옵션이 아닌, 브랜드로의 특별함을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비스포크는 디자인 스페셜 브랜드가 아닌, 삼성 가전의 프리미엄 기본 사양이 된 느낌이다. 문제는 범용화 그 자체가 아니다. 범용화 이후에도 비스포크가 앞으로 어떤 브랜드가 될 것인지에 대한

선언과 재정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브랜드는 확장될 수 있다. 특별한 자산을 레버리지 하고 싶은 건 기업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나 합리적인 접근이다. 그리고 브랜드는 단순히 확장했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함을 잃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활용 영역이 확장되었다면, 앞으로 브랜드가 수행하게 될 역할 역시 재규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소비자에게 어떤 가치가 생기는지도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즉, 브랜드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재설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브랜드 확장 이후에도 같은 언어를 같은 조건에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브랜드는 힘을 잃기 시작한다.


범용화의 압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


비스포크는 범용화의 압력을 받았을 것이고 실제 범용화의 길위에 들어섰다. 이제 필요한 건 명확한 선택과 선언이다. 비스포크는 다음의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dbtj_2.jpg 브랜드가 작동하는 조건을 풀지않는 파타고니아


첫째, 범용화를 인정하는 길 (Default)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비스포크는 이미 특별함에서 멀어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브랜드가 아닌, ‘표준’을 장악하는 브랜드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 경우, 비스포크는 하나의 철학이나 취향이 아닌, ‘시스템’으로 기능하게 된다. 국내의 많은 주거 브랜드들이 지방 시장 확장을 위해 선택했던 길이기도 하다.


둘째, 다시 특별해지는 길 (Containment)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비스포크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조건을 조직 차원에서 다시 선언하는 것이다. 브랜드의 카테고리를 냉장고 중심으로 축소하고, 컬러와 소재의 시즌을 제한하며, 브랜드가 작동하는 조건을 다시 잠그는 길이다. 그렇게 시간이 축적된다면, 비스포크는 다시 취향의 언어가 될 수 있다.

파타고니아는 이미 대중 브랜드이지만, 모두를 위한 아웃도어가 되려하진 않는다. “Don’t buy this jacket”처럼 불편한 조건에서 브랜드를 작동시킨다.


셋째, 상위 언어를 만드는 길 (Layering)

가장 복잡한 선택이다. 범용화된 비스포크를 인정하되 그 위에 더 좁은 언어를 쌓아가는 길이다. 비스포크는 기본 디자인 시스템으로 기능하게 되며, 상위 레이어에 비스포크OOO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즉, 비스포크는 표준을 담당하고 비스포크OOO은 취향을 담당하는 것이다. 스타벅스는 스타벅스 리저브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있다. (다만, 브랜드 위계가 복잡해진다는 문제가 남는다)


선언없는 확장은 위험하다.


세 방향 모두 쉬운 길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 브랜드를 살리는 선택이다. 아무런 선언도 없이 이름과 컨셉을 그대로 유지하며 확장만 지속한다면, 브랜드는 결국 디자인 옵션을 구분하는 식별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 사람들은 비스포크이기 때문에 구매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삼성이기 때문에 구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굳이 복잡하게 비스포크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라는 질문이 조직 내부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작동하는 언어는 편리하지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선언 없는 확장은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불필요한 옵션으로 만든다. 그래서 확장의 순간을 맞이한 브랜드가 대답해야 할 질문은 단 하나다.


"이제 이 이름은 어떤 조건 위에서 작동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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