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덕질 생활을 위하여
한동안 아이브 언니들에게 빠져 살던 6학년 딸. 앨범과 굿즈 수집에 열과 성을 다해 덕질하던 시기가 있었다. 좋아하는 아이돌을 추앙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안되지만, 요즘 시대의 덕질은 엄청난 물질 소비를 수반하기 때문에 부모 입장에서 그저 좌시할 수만은 없다. 특히 물건 하나하나의 가성비를 따지는 엄마로서는 딸의 행태가 영 마뜩잖았던 게 사실. 듣지도 않을 CD가 들어 있는 앨범이 몇 만 원씩 하질 않나 눈이 튀어나올 금액의 굿즈들을 탐내는 모습을 보노라니 덕질을 마냥 응원할 수는 없었던 거다. 요즘 문화라곤 하지만 뻔하디 뻔한 상술에 같이 손뼉 치고 싶은 기분은 아니랄까. 허나, 대놓고 안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막아설 용기는 없지만 한편으론 쿨한 엄마로도 인정받고 싶은 이중적 마음의 나는 딸과 겨룰 때마다 늘 진이 빠졌다.
정기적인 용돈을 받지 않는 딸은 신상 앨범이나 굿즈가 나오면 부모에게 손을 벌리곤 했다. 그냥 한번 눈 딱 감고 사주면 모든 것이 평화롭겠지만, 이러한 소비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봐 걱정이 앞섰다. 섣불리 다 사줄 수 없으니 적당한 범위에서 사기로 합의했으나 그것도 쉽진 않았다. '적당함'이란 단어의 애매모호함은 서로에게 다른 의미였기에. 최대한 좋게 좋게 타협하려 애썼지만 "다른 엄마들은 다 사준다는데"라는 아이의 주장과 "갖고 싶다고 다 사줄 수는 없어"라는 나의 주장은 대부분 맞닿지 못하는 평행선을 달리곤 했다.
몇 년 전 딸은 조부모님께 받아온 용돈의 향방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항상 통장으로 직행해 온 덩어리 용돈. 머리가 굵어지면서 용돈의 흐름에 의구심이 생겼는지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통장 잔고를 확인시켜 주어도 수중에 없는 자신의 돈은 그림의 떡. 결국 일부 금액은 덕질 비용으로 따로 떼어주었는데 이 돈을 차곡차곡 모아 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아무튼 아이돌 앨범의 후폭풍이 잠잠해질 만하니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뭐어? 잠뜰 TV? 픽셀리?
얘네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궁금하면서도 굳이 검색은 하지 않는 귀찮은 엄마. 딸이 설명해 준다 해도 굳이 또 길게 듣고 싶지는 않은 마음. 아마도 딸의 덕질에 대해 탐탁지 않은 내 본심 때문이리라.
딸은 한동안 그들의 유튜브 채널을 즐겨 보더니 지난봄에는 신상 굿즈를 사고 싶어 몸이 방방 뜨기 시작했다. 결국 인형 키링과 스티커, 메모지 등 각종 문구류 구매에 거진 7만 원을 쓰고 말았다. 내 눈에는 다이소의 그것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딸의 눈에는 하나하나 소중하고 귀하디 귀했다. 공룡 키링은 반려 키링처럼 늘 딸의 가방에 붙어 있으며, 볼펜 세트는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고 박스 채로 박제되어 있다. 이 캐릭터들이 너무나 좋아서 여러 날 태블릿을 끌어안고 그린 그림은 출력해서 액자에 넣어 걸어두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새로운 굿즈가 공개된다며 며칠 전부터 설레던 딸은 자신의 용돈을 내밀며 온라인 구매 대행을 요청했다.
"엄마, 이 돈으로 사주세요. 이건 정말 꼭 사야 해."
피규어 세트와 키링 세트에 배송비 3500원까지 하니 9만 2천 원. 이 금액을 주고 사는 게 과연 맞나. 이 금액이 결코 적지 않은 돈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이 금액의 가치에 대해 여러 번 당부했다.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지만 이 소비가 부디 일시적인 즐거움과 만족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딸이 경험하는 덕질의 세계가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확장되기를 바람과 동시에, 나 또한 바른 길잡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사고 싶은 옷이나 물건들은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도 딸이 갖고 싶다 하는 것은 대차게 구매해 버리는 나. 어쩔 수 없이, 가성비주의자는 자식의 덕질 앞에서만큼은 가성비를 따지기 힘든 최강 약자가 되고 마는 건가. 이번에도 구매 후에 찜찜함이 있었으나, 기왕 사주기로 한 것 기분 좋게 사주고 앞으로 공부든 뭐든 스스로 해야 할 일은 열심히 해나가기로 약속한다.
무엇보다, 이번 구매에 대해 마음이 너그러워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제 딸이 만들어온 에코백 때문인데, 학교 실과 수업에서 만들었다며 들고 온 그것을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잠뜰 TV의 캐릭터들을 그리고 오려서 정성껏 홈질로 꿰매 완성한 그것은 딸의 덕심(悳心)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색색의 부직포를 골라서 모양을 그리고 배치를 고민하면서 애썼을 그 시간과 마음이 손놀림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그래, 가성비 제로여도
이런 창의적인 즐거움을 준다면 가끔 딸의 덕질을 응원해도 괜찮겠다 싶은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