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 보는 사람들에게 느낌표만 선물해 주기
친절에 대해 쓴다더니 뜬금없이 왜 회의록을 요약하라는 걸까?
어쩌다 보니 사내에서 회의록을 잘 요약하는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남이 아무렇게나 써둔 회의록을 보는 게 지나치게 절망스러워서 나서서 쓰다 보니 어떻게 써야 한다고 알려줄 수 있는 기술이 생긴 듯하다.
친절하게 소통한다는 말은, 말의 앞뒤에 �꽃�이모지를 붙이란 뜻이 아니다.
적어도 회사에서 친절한 말하기라는 것은 상대가 최대한 물음표를 덜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2시간 동안 회의를 마친 타 팀이 무슨 얘길 했나? 궁금해서 회의록을 열어보면 이것이 안건인지, 회의 전 정리사항인지, 결론이 무엇인지 물음표 투성이인 순간이 너무 많았다. 적어도 내가 쓴 회의록을 본 사람에겐 느낌표만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을 준비했다.
- 회의록을 써야 하는 막내
- 회의를 주최하는 사람
- 어느 정도 리더 급인데 묘하게 내가 쓴 글이 사람들에게 잘 안 읽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
(사실 위 느낌을 받으면 보통 그 사람은 스스로 발전할 방법을 알기 때문에 어불성설이긴 한데)
아무튼 남이 말하는 걸 정리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
예시를 들어 설명해 보면 나는 지금 회의담당을 맡게 된 인사담당자 라고 해보고, 이번 회의가 '지각자가 너무 잦아진 요즘, 회사 내 대처방안이 없을 때'라고 가정해 보자.
회의는 큰 타임라인으로 정해 보면 아래 3가지 타임라인이 있다.
- 회의 전
- 회의 중
- 회의 후
(이 모든 과정을 연주하는 사람은 한 명 '회의 담당자')
회의 담당자를 도와줄 수 있는 옵션은 최대 2개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 타임키퍼
- (서브) 회의 기록자
나는 여기서 회의 진행자가 기록을 담당하고, 기록자가 얘기하는 순간엔 그 이야기를 받아 적을만한 믿을만한 서브 기록자를 두는 걸 추천한다. 결국 기록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최소 '정말 최소' 진짜 이 사람이 무진장 급했구나 와 이걸 하루 전에 전달해 놓고 저렇게 태연하네 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을 수준이 '하루 전'
당일공유: 회의록 안 읽고 들어와도 할 말 없음
회의록은 2~3일 전 공유하는 걸 추천한다. 너무 일찍 공유하면 나중에 봐야겠다~하는 천성으로 글러먹은 사람들은 잘 안봄.
참고로 회의에는 '기록자' '진행자' '타임키퍼' 세 명이 있는 게 좋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진행자 겸 기록자' '타임키퍼' 이렇게 두 명으로 해도 무방하다.
타임키퍼란, 이 회의를 00분 안에 끝내겠단 목표가 있을 때, 안건이 동일한 시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맺고 끊음을 해줘야 하는 역할로 단호함과 목표의식이 분명한 사람에게 맡길 것을 추천한다.
미리 공유할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 회의 참여자
- 회의 날짜 및 시간
- 회의 목적
- 회의 안건
- 의견 써둘 수 있는 공간 > 없으면 생각해오라고 하기.
[예시]
- 회의 참여자: 이재훈, 구교환, 손석구
- 회의 날짜 및 시간: 2024년 5월 3일 11시
- 회의 목적: 지각자가 너무 잦아진 요즘, 회사 내 대처방안이 없어서 불만이 나오고 있음. 해결 방안 필요.
- 회의 안건: 지각자에게 회사가 취해야 할 방안은 아래와 같습니다. 결정된 건 아니니, 각 방안에 의견을 달아주세요!
*앞에 [이름] 쓴 다음 의견 작성해 주세요!
[아래 제안을 확인 후, 의견 달아주세요]
1. 지각 3번까지 봐주고 그 이상시 근태점수에 반영 후 인사고과시 불이익 공지
2. 봐주는 거 없이 지각은 무조건 근태에 반영
3. 지각의 유형을 나누고 대중교통 지연일 경우 지각 무효처리
4. 추가 의견 작성해 주세요!
회의 당일, 적어도 5분 전 회의실에 도착해서 컴퓨터 세팅을 한 후, 사람이 다 모이면 모여서 해결해야 하는 회의의 목적과 안건을 한번 훑어주자!
가장 복잡한 시간이다. 만약 내가 진행자 겸 기록자 겸 참여자 라면
한 번에 멀티 태스킹을 5가지는 해야 할 수 있다.
자꾸 왜 주제와 다른 말들만 저렇게 지거릴까? 입술을 잡아 뜯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연습하면 할 수 있다.
회의록은 '받아쓰기가 아니다'를 기억한다.
[회의내용 카테고리화]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해보자.
다양한 의견과 티 안나는 비난, 이죽거림과, 돌려 까기와, 깊은 고민을 하고 온 사람과, 지금 막 고민을 하는 사람이 뒤섞인 자리에서 의견은 반틈 베어 먹다 터져버리는 방울토마토의 육즙처럼 의도와는 상관없는 실수를 하게 만든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람들이 내는 의견에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어쨌든 다행인 건 회의시간에 이야기하는 대부분은 종류가 크게 많지 않다.
이게 무슨 소리냐? 회의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다음 카테고리 안에 거의 대부분 속하고 다음과 같은 라벨을 붙일 수 있다.
[의견] (우려/기대/아이디어)
[결정]
[조사 필요]
회의록은, 이야기의 흐름대로 쭉 쓰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뇌 속에서 이 말의 라벨이 어디에 가야 하는가?를 확인한 후, 저 3가지 칸 안에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a: 요즘 지각자가 너무 많으니 지각비를 걷는 건 어떨까요?
b: 지각비는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어서 위험할 것 같아요.
c: 우선 횟수제한을 두는 건 찬성입니다. 사내 분위기가 자유로운 문화를 지향하기도 하니, 3번까진 지켜보고 그 이후엔 책임을 묻는 제도가 좋아 보여요.
ab: 찬성입니다.
a: 이후에 근태점수에 몇 퍼센트로 반영해야 할지는 찾아본 후 공유해 드릴게요.
위와 같은 대화를 했다고 하면 이 대화는 위에 적은 것처럼 드라마 각본처럼 공유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기록되어야 한다.
#지각 대처 회의 1차
- 회의 참여자: 이재훈, 구교환, 손석구
- 회의 날짜 및 시간: 2024년 5월 3일 11시
- 회의 목적: 지각자가 너무 잦아진 요즘, 회사 내 대처방안이 없어서 불만이 나오고 있음. 해결 방안 필요.
- 회의 안건: 지각자에게 회사가 취해야 할 방안은 아래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정된 건 아니니, 각 방안에 의견을 준비해와 주세요!
[아래 제안을 확인 후, 의견 달아주세요]
1. 지각 3번까지 봐주고 그 이상시 근태점수에 반영 후 인사고과시 불이익 공지
2. 봐주는 거 없이 지각은 무조건 근태에 반영
3. 지각의 유형을 나누고 대중교통 지연일 경우 지각 무효처리
4. 추가 의견 작성해 주세요
----------------------------안건으로 나눈 의견 기록-----------------------
#지각 횟수 관련
[의견]
- 지각비를 걷기
[우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음
[결정]
- 횟수 제한 3회
[기대] 책임의식이 더 고취될 것 같음
[조사 필요]
- @a 님 / 3회 이후 근태점수에 몇 퍼센트 반영할지 공유.
여기에서 회의 기록자가 센스 있게 "a님 근태점수 반영 공유를 해주시기로 했는데, 이번 주 내로 가능할까요? 아니라면 다음 주로 적어두고 리마인드 하겠습니다"라고 회의 말미에 해주면 티 나지 않게 마감일을 설정하도록 유도 - 재촉할 수 있다.
만약 노션을 쓰고 있다면 회의록 '결과' 란을 싱크드 블록으로 만든 후, 각 안건에 대한 결론을 모아두는 창구로 사용해도 좋다.
이렇게 써야 어떤 안건이 오갔는지 읽는 사람이 흐름을 알 수 있으며, 각 안건당 어떤 이야기가 오갔고 "그래서 결국 어떤 마무리가 되었나"도 알 수 있다. 만약 저기에서 이야기만 잔뜩 나온 채 결정되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그냥 [결정] 란에 "뚜렷한 결과 도출 되지 않았음. 추후 재 논의 필요"라고 써놔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의 담당자는 꼭 리마인드 해야 함)
지금 이어지는 대화에 빠르게 '소제목'을 붙이고 그 아래 휘발되어 가는 말의 멱살을 붙잡아 라벨링 한 후, 회의록에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 진행자 겸 기록자는 회의에서 얘기하는 안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좋다.
만약 이것이 숙달되어 빠르게 정리하는 게 가능해진다면 의견을 '누가' 얘기했는지 적어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회의가 끝났고, 여러 가지 결정사항과 미결정 사항, 확인이 필요한 사안을 적은 채 회의실을 나선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할 때 '수' '고' '하' '셨' '습' '니' '다'라는 음절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회의시간에 나눈 이야기는 10%씩 망각된다.
모두가 70% 휘발된 상태에서 자리에 앉았을 때, 회의 담당자는 마지막 펀치를 날려줘야 한다.
회의록을 봐야 하는 사람, 참고해야 하는 사람, 방금 '조사 필요' 라인에 이름이 멘션 된 사람, '결정' 라인에 이름이 멘션 된 사람 등... 을 정리해서 채널에 공유해 줘야 완벽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망각곡선이 저 너머로 넘어가기 전에 한번 더 붙잡는 것이다.
#ㅇㅇ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회의록 링크 �공유드리니 참여하지 못한 분들 한번씩 읽고 참고해 주세요!
[결정사항]
지각 횟수 3회 이후 근태점수 반영하기
[확인 필요 사항]
@임시완 님 셀카사진 공유해도 법적 문제없는지 확인
@타노스님 랩 금지 규칙 만든 후 컨펌받기
@인사담당자 님 근태점수 반영 퍼센트 결정 후, 사내공지
정도의 메시지를 보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능하다면 저 메시지를 보낸 즉시, 일주일 후 '나에게 리마인드' 기능을 켜두고 일주일 후에 담당자들이 제대로 일을 진행했는지 확인까지 하면 금상첨화.
사실 회의록은 회의록에 '공책 없이 들어온 사람' 혹은 '회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그래서 더 많이 다듬고 라벨링 해서 공유해야 서로가 이해하기 편한 것이다. 회사에서의 친절한 소통은 회의록에서 드러난다.
다른 업무가 바빠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 회의내용 파악이 필요한 경우 친절하게 소통하는 창구인 것이다. 친절하지 못 한 회의록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을 수 있다.
회의: 지각 근태관리
회의 내용: 지각 근태 관리 횟수를 결정 필요. 책임의식 필요. 추후 확인.
위 두줄의 아주 '불친절한 회의록'이 무섭겠지만 실제 할 수 있으며 만약 "이딴 고집불통 싹퉁머리 없는 회의록이 존재한다고???" 싶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의 회사는 기본적인 배려 수준이 뛰어난 듯하네요.
회사 내에서 친절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회의록 작성이 모두에게 쉬워질 수 있길! 오늘도 굳이 친절해보는 한 걸음을 가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