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긴 눈물

할머니

by 위로한줄

‘공동의 적은 사람을 묶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에게 그 적은 친할머니였다.


부모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온 아빠조차,

엄마 앞에서는 단 한 번도 할머니 편을 들지 않으셨다.

엄마에게 할머니는 단순한 고약한 시어머니, 그 이상이었다.


갓 출산을 마친 엄마에게 밭일을 시켰던 이야기.

고생하는 딸을 보러 먼 걸음 하신 외할머니를

문 앞에서 차갑게 돌려보냈던 이야기.


말로 다 꺼내지 못한 기억의 파편을 꺼낼때면,

엄마는 늘 눈가만 훔치고는 말을 멈추셨다.

울지 않은 듯 울어온 시간.

그 긴 세월을, 엄마는 눈물로 견디셨다.


아빠에게 할머니는, 친엄마였지만

동화속 여느 새엄마들처럼 낯선 사람이었다.


손이 없이 일찍 돌아가신 큰할아버지 밑으로,

아빠는 족보상의 이유로 양자로 들어가셨다.


출산의 고통보다

족보에 새겨진 이름이 더 선명해서였을까.

그녀는 조카를 대하듯 아빠를 대했다.


가까이서 모시는 아빠보다

멀리 떨어진 다른 자식들이 더 애틋했던 걸까.

아빠와 엄마에게 쌀쌀맞던 그 얼굴은

다른 자식들 앞에서는 정 깊은 엄마로 바뀌었다.



할머니를,

아빠와 엄마는 40년 넘게 모셨다.


문드러지는 속을 서로 다독이며,

자식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 모진 세월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더 단단히 동여맸다.


가끔은 그 서사의 중심에 선

아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모두에게 애틋한 ‘엄마’라는 이름이

아빠에겐 무엇으로 남겨졌을까.


그 절반의 피를 원망하며

아빠는 몇 번이나 긴 밤을 삼키셨을까.

누구에게도 죄스러웠을

그 밤들은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홀로 지내시다

조용히 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셨다.

그녀의 마지막은 조금은 초라했지만,

우리 가족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나는 지금처럼 해외 주재원 생활 중이었고,

코로나로 막힌 하늘길 탓에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날, 통화 너머로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는

익숙한 침묵처럼 조용히 흘러갔다.

몇 마디 나누지 못한 말들 속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40년 넘는 인내가 끝나던 날.


아빠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물로

그 시간을 보내셨을까.


나는 아직도

그 눈물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보지 못한 눈물이,

유독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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