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피어나는 내일

엔지니어

by 위로한줄

나는 엔지니어다.


하지만, 스스로를 엔지니어라 자각한 건 입사 후 5년쯤 지나서였다.

그 전까지 나는 그저 ‘직장인’이었고, 누군가 내 직업을 묻는다면

‘사무직이에요’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한국에서 ‘엔지니어’라는 단어는 어딘가 얼렁뚱땅 취급된다.

회사에서는 우리를 엔지니어라 부르지만,

각종 서류에는 사무직이나 기술직 같은

나를 설명하기엔 부족한 단어만 남아 있었다.

공대를 나와 공정 기술만 해온 나조차

‘엔지니어’ 하나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낯설었다.


반면 미국에서 ‘Engineer’는 분명한 직업군이었다.

서류 어디에나 그 이름이 있었고,

자신을 소개할 때 “I’m an engineer”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엔 약간의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 명함을 얻기 위한 자격증도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엔지니어는 존중과 경외의 눈길을 받았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기술 강국이다.

하지만 그 기술을 지탱해 온 수많은 엔지니어들은

늘 ‘중간 관리자’, ‘현장 실무자’쯤으로 치부되었다.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결국 엔지니어도 관리자가 되어야 했다.


아빠는 농사꾼이었다.

일 년 열두 달, 하늘과 땅을 상대하며

정해진 월급도, 보장된 성과도 없이

그저 묵묵히 일하셨다.


그 시절, 농사일은 쉽게 존중받지 못했다.

허리가 굽고 손발이 거칠며,

늘 냄새가 배어 있는 일.

도시 사람들은 흙을 꺼려했고,

아이들도 그걸 부끄러워했다.


나 역시 어릴 적엔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학교에 적는 ‘아버지의 직업’ 칸은 유독 작아 보였고,

‘농업’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쓰기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무엇보다 귀중한 일이었다는 것을.

아빠가 지은 밥 한 그릇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흙을 다루는 손은 생명을 다루는 손이었고,

그 땀방울은 누군가의 밥상이 되는 정직한 노동이었다.


농사꾼의 손과 엔지니어의 손은 닮아 있다.

눈에 비치는 작업복의 질감보다

그 일이 세상에 전하는 가치를 헤아릴 때,

비로소 그 이름의 무게를 알게 된다.


아버지가 흘린 땀방울에서 생명이 꽃피듯,

내가 버텨낸 오늘도 누군가의 내일을 움직이길 바란다.

내가 만든 배터리가 세상을 달리고,

내 손끝에서 흘린 시간들이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오래 가게 하길 바란다.


‘엔지니어’라는 이름을

조금 더 단단히, 그리고 소중히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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