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읽고
월터 J.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는 제목 그대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차이에 대한 비교 및 분석을 주제로 하는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술문화란, 소위 말하는 ‘문맹 사회’ 즉, 문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음성언어로서만 커뮤니케이션하는 원시적인 문화를 일컫는다. 그러나 두 문화를 동등한 위치에서의 대비되는 문화로 양분하여 대조할 수 없는 것이, 저자를 비롯한 독자들은 이미 문자문화에 익숙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이 구술문화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문자’를 기반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구술문화의 특성을 온전하게 설명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구술성을 문자문화의 틀 안에서 논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계 내에서나마, 저자는 최대한 구술문화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책의 많은 부분을 구술성과 관련된 논의에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문에서 저자 옹은 ‘구술문화에서의 사고와 언어 표현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구술성에 초점을 둔 주제가 이 책의 가장 우선적인 핵심 주제라고 밝힌다. 이는 자칫 저자가 구술문화를 신봉하거나, 구술문화의 가치를 문자문화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저자는 구술성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모든 문화에 대비하여 구술문화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명시하며, 인간 의식의 진화에 있어 구술성과 그것으로부터의 문자성의 성장 모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¹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특정한 학파나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도 않다. 구조주의, 형식주의, 해체주의 등 기존의 관점으로 구술성과 문자 성을 대조시켜 양자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다양한 양상’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옹이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구술을 통해 이루어지느냐, 문자를 통해 이루어지느냐의 문제를 그 사회 구성원의 사고체계와 ‘필연적으로 맞물리는 것’으로 결부시켜 분석했다는 점이다. 한 사회에서 당연하게 인식되는 문화적 성질들이 구성원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천성이 아니라 ‘말하기’ 또는 ‘쓰기’라는 기술에 의해서 구성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옹의 관점에서 보면, 한 사회의 사회·경제·정치·종교적 구조까지도 모두 그 사회의 구술성 또는 문자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옹이 설명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각각의 정신 역학적 특징과 그 차이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한 가지 전제를 앞세우고 싶다. 이는 ‘인간은 모두 커뮤니케이션하는 존재이다’라는 전제인데, 인간을 보편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존재로서 인식하는 전제가 뒷받침되어야지만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방법과 그 역사·문화를 비교·분석하는 이 책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한 논의가 유의미할 것이다. 옹은 문자문화와 대비되는 구술문화의 특징으로서 다음과 같은 9 가지를 정의한다:
(1) 종속적이라기보다는 첨가적이다
(2)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이다
(3) 장황하거나 다변적이다
(4)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다
(5) 인간의 생활세계에 밀착된다
(6) 논쟁적인 어조가 강하다
(7) 객관적 거리 유지보다는 감정이입적 혹은 참여적이다
(8) 항상성이 있다
(9)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상황 의존적이다
거칠게 중점만 요약하자면, 1차 구술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말’이라는 휘발성이 강한, 즉 말하는 순간에만 존재하고 바로 사라지는 청각적인 언어를 매개로 소통하기 때문에, 말을 기억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간결하고 논리적인 문장보다는 장황하고 다변적인 설명과 형용적 표현을 사용해 상대방의 기억을 돕는다. 또한 반복법이나 대구법과 같은 운율을 만드는 요소와, 정형구를 많이 사용한다. 정형구는 사회의 통념을 반영하는 형태로 생성되기 때문에, 구술문화의 사고방식은 전통에 고착화되고 보수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구술문화의) 정신은 전체화되어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² 필사 문화에서는 정형구의 역할을 ‘쓰기’가 대신한다. 쓰기는 말을 공간 안에 가둬두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과 전승이 용이하다. 따라서 문자문화 또는 인쇄문화는 인간을 ‘암기’라는 족쇄에서 해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대신 텍스트로 기록된 지식정보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창조적인 일을 시도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³ 이것이 구술문화에서는 많은 지식을 보유(암기)하고 있는 노인들이 보다 존중받는 반면, 문자문화에서는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발견하는 젊은이들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는 이유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옹의 분석대로라면 문자문화, 인쇄문화를 넘어 전자 문화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암기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색을 펼치고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식정보를 암기하는 것이 중요시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육의 현장에서 그러하다. 이것이 학생들로 하여금 교과서(textbook)의 텍스트를 암기하도록 요구하는 형태의 한국 교육이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욱이 구술문화에서의 암기보다 문자문화에서의 암기가 더욱 소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술문화에서의 암기는 상대방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에 집중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문자문화에서의 ‘문자적인’ 암기는 수신자의 메시지에 대한 이해나 내면화 과정이 부재한 채로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문자코드를 해석해서 이해하기보다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텍스트 이미지를 암기하는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 저자의 메시지를 음성화하고 저자와 대화해보려는 시도 없이, 단지 문자를 해독하는 행위만으로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옹은 “생각해내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온갖 잡다한 지식이 넘쳐나는 현대의 ‘정보 홍수’ 사회에서, 인류 역사상 이제처럼 지식이 풍부했던 적은 없었다고 자부하면서도, 진정 내가 나의 것으로 내면화시킴으로 ‘알고 있는’ 지식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 드는 이유이다. 위장된 지식 과잉이 아닐까. 앎이 아닌, 포화된 텍스트만이 둥둥 떠다니는 사회는 아닐지. 여기서 문자성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을 통해서든 글을 통해서든 인간이 서로의 생각과 뜻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전달한다면 그 커뮤니케이션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특정 언어체계가 한 개인의 의식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그릇 밖으로 넘쳐나거나 그릇에 욱여넣다가 일부가 잘려나가고 뭉개지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언어의 한계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 경험이 많다. 말이든 글이든 왜곡은 불가피하다. 언어의 코드는 동일해도 이는 수신자의 배경과 경험에 따라 다르게 해독(decode)된다. 대체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문자’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관련해서 옹은 ‘모든 텍스트는 텍스트 외적인 뒷받침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롤랑 바르트의 지적을 인용한다. “어떠한 텍스트의 해석도 텍스트 외부로 나가서 독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⁴ 세대 간 전승은 논외로 하고, 송신자와 수신자 간의 일대일 커뮤니케이션만을 상정했을 때, 글보다는 말이 그 간극을 가장 좁힐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우선 구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고려해야 할 청자가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반면, 문자 커뮤니케이션은 그렇지 않다. 저자는 허구의 독자를 상상하여 글을 쓰게 된다. 게다가 만약 아무도 그 글을 읽어주지 않는다면(독자가 없다면), 그 문자들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도는 말과 같이 되어버린다. 적어도 구술적 ‘발화’는 살아있는 사람에 의해 생겨난다. 그러나 독자의 ‘읽는’ 행위 즉, 텍스트를 음성으로 옮기는 일을 통해 ‘발화’되지 않는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옹은 말한다. 또한, 텍스트 속의 말은 비언어성이 결여되어있다. 옹은 이를 ‘충분한 음성적 성질이 결여되어 있다’고 표현하는데, 말투, 억양, 제스처 등의 비언어적 성질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중요한 요소들임에도 문자는 이를 매우 한정적으로, 쉼표, 물음표와 같은 구두법을 통해 담아낼 뿐이다.
구술문화에 대한 설명 이후로 옹은 인쇄문화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인쇄는 동시다발적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성질로 인하여 지식정보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당시 ‘쓰여진’ 성서는 ‘문해력을 가진 자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문자문화의 폐쇄성에 의하여, ‘문해 권력’을 가진 성직자들에 의해 사유되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자의적 해석에 따라 줄곧 왜곡되곤 하였다. 또 이 왜곡된 성서의 말씀은 구술로써 청중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여기서는 구술성의 한계가 작용한다. 옹은 “축어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구술문화의 특유한 기억 형성은 어떠한 경우라도 사회의 직접적인 압력에 의해서 변용된다”⁵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구술문화의 집합성, 전체성까지 결합하여, 청중들에게 발화된, 변용된 성서 말씀은 성직자들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에게 고착화되고 통념화되어갔던 것이다. 15세기 중반 무렵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발명과 맞물려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성서는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의 소유가 되었다. 옹은 이것을 ‘말의 사적인 소유’라고 표현한다.⁶ 엘리자베스 아이젠슈타인은 그녀의 저작 「변화의 행위자로서 인쇄술」을 통해 서구에서의 인쇄술 발명이 종교개혁뿐 아니라 르네상스, 과학혁명 등 중세 서구사회의 사회·정치적 격변을 불러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옹은 역사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인류의 문화가 구술문화, 문자문화, 인쇄문화, 전자 문화 순으로 변해왔다고 설명하는데, 결코 이러한 방향으로 ‘진보’해왔다던가 ‘발전’해왔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구술문화가 문자문화보다 열등하다’ 내지는 ‘구술문화는 야생적이고 원시적이다’라는 문자문화 중심적 통념에 전면으로 맞서고, “구술성이 쓰기를 낳았다”며 구술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철학자 빌렘 플루서도 그의 저작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에서 비슷한 주장을 하는데, 그는 애초에 일직선적인 선형적 역사의식, 진보사관 등이 문자를 좌에서 우로 행에 맞춰 배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⁷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 문화는 구술문화에서 전자 문화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구술문화는 가장 원시적이고 열등한 문화이다’라는 주장은 문자문화 이래로 탄생한, 지극히 문자문화 중심적인 선형적 역사관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옹은 단순히 문자문화를 가능하게 한 구술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진보 사관에 따르면 가장 선진한 문화인 전자 문화를 구술문화로 환원하여 해석하기에 이른다. 옹은 전자 문화를 ‘2차 구술문화’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TV, 전화, 라디오 등의 여러 가지 전자매체의 발명으로 인해 다시금 음성을 활용한 청각적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진 문화를 일컫는다. 일종의 ‘구술문화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옹의 이러한 해석이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인류사의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 독자로 하여금 익숙했던 문자문화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문자를 전혀 모르는 구술문화를 상상하게 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지배적인 특정 관점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의심해보게 하는, 상당히 인식론적인 차원까지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옹의 표현에 따르자면 “텍스트에 묶여있는 우리의 정신을 해방하고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해져 온 많은 것들을 새로운 전망으로 비춰보게 된 것”이다.⁸
각각의 구술·문자·인쇄·전자 문화는서로 그 이전의 것의 기반 위에서 탄생했으며 상호적이다. 이를테면, 문자문화는 구술 문자 없이 탄생 불가능하며 전자 문화는 구술·문자·인쇄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는 2차 구술문화를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결합된 형태로 보는데, 2차 구술문화는 대중들의 참가, 현세적 성격, 정형구 사용 등의 면에서 1차적 구술문화와 놀랄 만큼 유사성을 보이는 한편, 청중이 부재한 가운데 허구의 청중을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문자문화와의 유사성 역시 동시에 보여준다. 사실상 2차 구술문화가 1차 구술문화의 온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녹음, 녹화 등의 기술 발명으로 음성의 현상학적 특성으로 인해 발화된 즉시 사라져 버렸던 음성 메시지의 내용과 그 발화 장면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 ‘기억하는 것’이 중요해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은 국경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2차 구술문화에서의 ‘집단성’은 1차 구술문화의 그것과 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게 커져버렸다. 마셜 맥루한의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이를 반증하는 듯하다.⁹
그러나 ‘진보는 더 나아지는 것과 무조건 동의어는 아니다’라는 빌렘 플루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나는 결코 전자 문화가 이전의 문화보다 더 나아진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 문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적절한 상호 융합을 통해 시청각적 메시지의 기록과 전승이 이전보다 훨씬 용이하고 정확해졌다는 이점이 있긴 하지만 또 동시에 2차 구술문화가 1차 구술문화의 장점, 문자문화의 장점을 모두 소실한 채 결합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먼저, 나는 1차 구술문화의 가치가 면대 면의 상호 교류에 있다고 생각한다. 1차 구술문화에서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소통함과 동시에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잠시나마 이상적인 소통방식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선통신은 원거리 소통을 용이하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내 주변 사람의 존재보다 전자 기기 속에 대상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시각적이냐 청각적이냐 (구술적이냐 문자적이냐)를 떠나서 존재론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면,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은 존재들 간의 실존적 대화라기보다는 디스플레이된 존재들의 정보 송수신에 가깝다. 사람들의 소통방식이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는 옹이 책 말미에 경계하듯 언급한 ‘지나치게 형식화된 미디어 모델’에 점점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¹⁰
2차 구술 문화 속의 문자문화 역시 그 장점을 소실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문자문화는 질서에 맞춰 글을 쓰고 논리구조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합리성과 체계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특징을 지닌다는 것을 우리는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점점 세대가 전자 문화에 익숙해져 갈수록 글 읽기에 피로감을 느끼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설명문보다는 짧은 영상 클립을 선호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유튜브와 같은 영상 미디어 플랫폼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젊은 연령층으로 갈수록 영상 매체를 선호하는 경향성이 뚜렷해진다는 점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문자를 주고받을 때에도 문법적이고 논리적인 문장 구조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마치 실제 대화를 나누고 수다를 떠는 것(chatting)처럼 실시간으로 구어체를 사용하며, 단어 단위의 짤막한 텍스트를 송·수신한다. 이모티콘은 문자 성의 한계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나와 상대방의 표정, 감정까지도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의 경계가 매우 흐릿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지만, 오늘날 문자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자명한 현실인 것 같다. 이것이 빌렘 플루서가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라고 질문하며 머지않아 글쓰기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고 비관하는 이유이다. ¹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는 이처럼 구술문화의 대면성, 문자문화의 논리성을 소실한 전자 문화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이며, 새로운 전자 문화의 흐름은 우리의 의식구조를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가 자문하게 한다. 인간적인 교감이 모두 끊긴 채 각자의 골방 속으로 들어간 히키코모리적 개인들의 넷 상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딱히 이 커뮤니케이션은 ‘진짜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쩐지 아톰 세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전부 비트 세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으로 환원되는 현상을 매일 낯설게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편치만은 않다.
개인적으로 구술성과 문자성의 양자 관계 탐구함에 있어서 리그베다를 비롯한 성서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로 시작되는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의 말씀’이라는 다분히 음성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문자로 ‘쓰여졌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하다. 구술문화·문자문화와 종교·성서에 대한 조사를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또 책을 읽으면서 논외로 치부되었던 언어인 수화나 점자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수화는 ‘시각화된 구술’이고, 점자는 ‘촉각화된 문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구술성과 문자성에 관련된 정신 역학 구조가 수화나 점자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수화나 점자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특정한 사고체계의 변형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1) “구술문화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그것을 어떤 항구적인 상태인 양 간주하고 모든 문화에 대비하여 그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본 책 p.260
2) Levi-Strauss 1966, p.245
3) “텍스트는 정신을 보수적인 임무에서, 즉 기억하는 일에서 해방시키고, 그리고 정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색으로 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Havelock 1963, pp. 254~305
4) Hawkes 1977, pp. 154~155, 본 책 p.241
5) 본 책 p,160
6) “인쇄는 말의 사적인 소유라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냈다.” 본 책 p.198
7) “문자기호들은 신화적 사고로부터 선형적으로 배열된 사고로 안내하는 하나의 인용부호이다. … 글쓰기 행위에 대한 이러한 최초의 관찰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행, 즉 문자기호들의 일직선적인 선형적 진행이다. … 문자, 이처럼 행의 형태로 기호들을 나란히 배열하는 것이 역사의식을 비로소 가능케 한다.” 빌렘 플루서,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엑스플렉스 출판) p.21~23
8) 본 책 p.232
9) 빌렘 플루서,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엑스플렉스 출판) p.17
10)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 혹은 ‘미디엄’을 생각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정보’라 일컬어지는 재료의 단위를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파이프 라인처럼 생긴 것으로 수송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품고 있다.” 본 책 p.261
11) “디지털 코드로서 탄생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공간 및 시간 경험이다. 그것은 모든 종래의 경험들을 부정해야만 한다. … 그와 같은 경험에서는 알파벳은 지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후자는 전자에 의해 소멸되어져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빌렘 플루서,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엑스플렉스 출판) p.239
*Cover Photo: <Communication Breakdown> Designed by. CalebLindenDesign
*학부 1학년 때 공들여 썼던 보고서! 교수님께 많은 격려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