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장은 나의 인생 속 키워드로 가득하다.
<미드& 스크린 영어회화 표현사전>부터 <월급쟁이 재테크>를 지나 <와인은 어렵지 않아>로 흘러가는 관심의 흐름들은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를 지나 40대의 나의 관심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하다. 일을 하는 동안 머리를 식히려 한 권씩 사들인 책들이 제법 책장에 빼곡한 모습에 나름의 큐레이션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같은 크기의 책들을 한 자리에 모아봤다. 단순히 보기 좋게 말이다. 그다음에는 소설, 자기 개발서, 에세이, 시집 등 종류에 따라 분류를 해본다. 마치 독립서점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제 멋대로 큐레이션에 뿌듯할 때쯤, 오래전 읽었던 작품을 다시 훑어보며 마치 신간을 읽는 듯한 생경한 느낌에 책장 속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무얼 먼저 읽어야 하나, 고민하며 책장을 훑어보다가 문득 이 책을 고를 때의 나의 감정과 상황들이 떠올랐다. 아 맞다. 이때 이런 고민이 있어 이 책을 샀었지.. 이건 남들이 다 읽어보길래 샀었고, 물론 선물 받은 책도 더러 있다. (참고로 그런 책들은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고민을 해서 골랐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1초 만에 집어 올렸던 나에게 책은 고민을 해결해 주는 스승이자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였다. 스트레스와 고민으로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던 방황하던 나와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로 텅 비여버린 상처받은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그런 존재. 그런 작은 존재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누군가도 나의 이 낡은 책상 속 책들에게 그런 위로를 받을 수 있길 바라며, 인테리어 소품용으로도 잘 쓰이고 있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꽃>부터 적어보려 한다.
유튜브 <조승연의 탐구생활>에 심취해 있던 때가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박식할 수 있는가, 말까지 똑 부러지게 하는 이 남자의 스마트한 매력에 한 동안 푹 빠져 있었다. 이 책은 그의 콘텐츠를 꾸준히 보던 때에 '그의 인생을 변화시킨 시'라는 제목의 콘텐츠를 보다가 구매하게 된 책이다. 시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시를 전혀 읽지 않은 나를 깨닫게 된 때이기도 하다. 동시에 보들레르라는 위대한 시인의 책을 읽으면 "나도 좀 달라 보이려나?" 하는 허황된 마음에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펼쳐 보았을 때 너무 새 책이라 잘 펴지지도 않는 모습에 정말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아마도 표지에 그려진 멋진 그림들 (앙리 마티스 에디션)때문에 더 빠르게 구매를 결정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우리 집 한편에 자리 잡은 멋진 인테리어 소품이기도 하니까. 그의 콘텐츠가 4년 전에 업로드가 되었으니, 그때는 한 창 회사일이 아닌 어떤 공부도 하지 못해 지적 굶주림이 최고조인 상태였을 때다. 누구라도 회사 일 외의 것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 그를 만났고, 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 마티스의 그림을 보는 재미로 책장을 넘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4년이 흘러 다시 읽어보아도 시의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게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이 책에 대해 조금 소개하자면, 샤를 보들레르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를 품은 현대시의 초석을 이룬 시인으로, 1944년 화가인 마티즈가 <악의꽃>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직접 보들레르의 33편의 시를 고르고 그 시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으로 채워진 작품이다. 당시 마티즈는 병에 걸려 몸이 좋지 않았음에도 침대에서 연필로 이 그림들을 그려 작품을 완성했다고. 이 모습을 본 루이 아라공이라는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보들레르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마티스의 모습을 보았다."
이 한 줄보다 더 이 작품을 단번에 나타낼 수 있는 추천서가 또 있을까. 당시 기억에 이 책을 팔에 끼고 걸으며 마치 지식인이라도 된 양 값비싼 명품백을 든 이들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작 나는 이 책의 내용하나 이해하지 못했으나, 남들과 다르고 싶던 나의 욕망을 단숨에 채워주던 작품이었다. 우연히 책장 첫 층에 있어 <악의꽃>을 소개하게 되었고, 비주얼이 괜찮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용을 소개해야 하는 막막함에 시간을 좀 흘려보냈다. 그러나 첫 번째 글로 남들에게 보여주기엔 이만한 작품도 또 없지 않을까. 보들레르에 마티스라니, 시작이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