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0(D+14)_베트남/호이안
흔히들 이야기한다. 아주 친한 사이도 여행을 함께하면 싸우고 돌아온다고 말이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이 '시끄러운' 여행을 하는 경우도 종종 봤을뿐더러 나 역시 긴 여행에서는 동행들과 몇 차례씩 부딪혔던 기억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취향이라는 것이 모두 다른데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하루 종일 붙어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게다가 현대인의 여행이란 게 애써 모은 돈을 가지고 없는 시간 쪼개서 하는 경우가 많아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는 욕구는 평상시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르다고 하면 모든 계획을 아빠가 세우고 수동적으로 따라오고 있는 상황이니 본인의 의사를 주장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아들이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도 갖고 있는 정보는 적고 그러니 그저 가자는 대로 따라오고 있는 게 그의 상황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가 관심이 없는 분야의 어떤 곳에 가면 너무도 확실한 티가 난다. 그래도 이제 초등학교 졸업했다고 징징거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은 대견하나 감정까지 숨기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결국 나는 아들의 현재 심리를 알 수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급해진다.
오늘은 호이안에 미선 유적지라는 곳을 다녀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세계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나는 이런 곳을 좋아한다. 이런 곳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주 옛날 유적지이고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많이 부서지고 무너져서 내 마음대로 생각해도 별 문제없는 곳들이다. 물론 주류 학계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예전 모습이 복원된 것이 아니라면 상상의 공간도 열려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상상 속에서 여러 이야기들도 나오는 법이고 말이다. 미선 유적 역시 많은 부분이 역사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지만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상상하는 건 내 몫일게다.
그래서 나는 이런 곳에서 공상에 사로잡히는 것을 좋아한다. 터무니없는 얘기일지라도 그냥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를 하나만 들어볼까. 미선 유적의 건물들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졌는데 그 틈에 접착 물질, 그러니까 요즘으로 따지면 시멘트 같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잉카 문명을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엄청난 석조 기술로 접착제 없이 돌들을 쌓아 올렸다. 지구 반대편의 문명이지만 이들은 관계가 없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잘도 간다. 적어도 혼자 다닐 때는 그랬다.
그런데 동행이 있으니 눈치가 보인다. 그 넓은 지역에 무너져내리는, 그것도 모두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만 쉬지 않고 등장하니 지루할 법도 하다. 그 건물들을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하는 아빠가 뭐 하나 싶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아들이지만 누군가가 유적지를 빠져나갈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면 나 좋다고 마냥 시간을 보내긴 어려운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어르고 달래며 시간을 조금 벌어보았지만 내 성에 차지는 않았다. 결국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유적지를 빠져나와 망고 스무디를 마시며 오지 않은 차를 기다렸다. 아들은 세계문화유산보다 망고 스무디가 훨씬 좋은 듯 보였다.
저녁에 호이안 옛 거리를 산책하며 아들에게 물었다. 유적지는 별로 취향이 아닌 듯한데 너는 어떤 여행이 좋냐고. 그는 시원한 숙소에 누워 핸드폰 하는 게 좋단다.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럼 이런 여행을 뭐 하려 하냐 했더니만, 그제야 좋은 경치를 보는 게 좋단다. 먼저 말한 대답이 아들의 진심임을 알지만 그렇다고 애써 만든 세계일주 기회를 사이버 세상에 가둬버릴 수는 없다. 그러니 두 번째 대답이라도 충족시켜 주며 데리고 다녀야 할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유적지도 가고, 또 가끔은 그가 좋아하는 좋은 경치도 구경하면서 그렇게 각각의 여행의 취향을 맞춰가다 보면 어느새 서로의 취향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