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1(D+15)_베트남/호이안
실로 오랜만의 여유다. 한 도시에 사흘 이상 머문 적도 거의 없지만 머물 때도 늘 무언가 할 일이 있었다. 호이안은 크지 않은 도시다. 계획을 세울 당시에 여기에 왜 사흘을 할애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덕분에 숨고를 시간을 갖게 됐다. 우리는 오늘 10시 넘어 느긋하게 일어나 씻고 짐 싸는데 무려 1시간 반을 사용했다. 이 정도면 짐을 몇 번은 풀고 다시 쌌을 시간이지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마저도 12시 체크아웃 시간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미적거렸을지 모른다.
호이안에서 둘러봐야 할 곳들은 이미 어제까지 모두 봤다. 물론 한 곳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데 사흘이란 시간이 결코 길지 않겠지만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눈부칠 곳을 바꾸고 있는 방랑자들이니 어딘가를 구석구석 살피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 떠나면 되지 않느냐'라고 물을 수 있지만 그것도 수월치 않은 것이 오늘은 냐짱으로 거처를 옮기는 날인데 이동 방식이 야간 버스다. 버스는 22시 30분에 호이안에서 출발 예정이라 꼼짝없이 하루를 호이안에서 보내야 한다. 나는 지금 호이안 맥도널드 구석 한편에서 이 글을 쓰고 있고 내 앞에는 감자튀김과 음료가 2잔 놓여있다. 현재시각 17시 30분이고 눈치가 보이니 조금 있다 햄버거도 하나 주문할 예정이다.
어쨌든 오늘은 두 번이나 왕복한 호이안 옛 거리에 다시 다녀왔다. 호이안 옛 거리는 그냥 거닐기에도 좋지만 중간중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구경하는 곳들이 있다. PKG 티켓을 구입하면 사흘 동안 유료 시설 세 곳을 둘러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데 오늘을 위해 남겨두었다. 특별한 일정도 없는 데다가 오히려 시간을 길게 써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모든 시설을 역사 학자처럼 세심하게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아들이 따라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보면 저 멀리서 전화를 붙잡고 히죽거리고 있다. 뭐 하나 싶어 물으니 여자친구와 통화 중이시란다.
여행을 떠나오기 얼마 전에 아들과 여자친구가 100일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의 시선에서 초등학생의 연애감정이라는 것이 선뜻 그려지진 않지만 또 나를 그 당시로 돌려놓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이성과의 관계에 눈을 뜰 나이 아닌가. 돌이켜보면 대만에서의 단발령에 대한 반발도 비슷한 감정의 발로이리라.(*5화 단발령과 파르페) 아무튼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아빠 때문에 1년이나 바다 건너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그 책임이 나에게도 없지 않다. 군대야 국가 권력이라도 개입했다 하지만 세계 일주는 아들의 그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생이별이었을 테니.
처음 몇 번은 여기까지 와서 전화통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는 아들을 보는 것이 울화통이 치밀어 쓴소리를 좀 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준비한 세계 일주가 반드시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으라고 준비한 게 아니라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삶의 가능성을 느끼게 할 요량이었다면, 어쩌면 사랑하는 이와의 애틋함을 느껴보는 것이 여행의 취지에 더 맞지 않겠는가 하는.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 아들이 생각하는 세상이 다를 테고 지금 그에게는 '그녀만이 걔 세상'일 테니 말이다.
아들은 그래도 아빠 눈치가 보였는지 전화를 연결했다, 끊었다 하면서 애써 무언가를 보는 척했다. 그때 마침 비가 내렸다. 아들을 위한 비였을까. 나는 더 이상 거리를 거닐 수 없어 길가의 한 카페에 들어가 앉았고 아이는 더 이상 무언가를 봐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해방됐다. 물론 내 앞에서 전화하기에는 수줍은지 카페 한쪽 구석에 앉아 전화를 이어갔지만 마음만큼은 한결 편했을 것이다. 그 후로도 비는 한참을 내렸다. 급할 것도 없으니 내리는 비를 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문득 나의 그녀가 떠올랐다. 나의 그녀가 있었다면 아마 아들의 전화기는 벌써 호이안 옛 거리를 따라 흐르는 투본강에 수장되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