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4(D+8)_베트남/하롱베이
하노이에서 2시간 조금 넘게 달리면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하롱베이에 도착한다. 보통은 하노이에서 투어업체를 끼고 다녀오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은 당일 투어가 인기인 모양이다. 우리도 하노이에 도착한 날 밤에 투어 신청을 했다. 가이드가 인솔하는 여행을 즐겨하진 않지만 하루 만에 하롱베이를 경험할 수 있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가이드는 매 이동시마다 인원 점검하는 수준의 역할만을 수행했고 우리의 하롱베이 여행은 거의 자유 여행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하롱베이 투어는 하노이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내리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롱베이 항구에는 하루 종일 우리가 타게 될 크루즈가 관광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크루즈에 몸을 올리면 이때부터는 정해진 일정표대로 움직이게 되는데 당일 투어의 대부분은 비슷한 관광코스를 거친다. 먼저 송곳 동굴이라는 거대한 석회 동굴에 들러 1시간 정도를 구경한다. 그 이후에는 카약이나 밤부보트를 체험하고 하롱베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된 섬에 들러 일정을 마친다. 다시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는 선상 파티가 열리는데 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역시 좋은 기억이 될 듯하다.
오늘의 이벤트는 두 번째 코스, 그러니까 밤부보트 '또는' 카약을 체험하는 곳에서 발발했다. 말 그대로 두 개를 모두 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체험하게 된다. 밤부보트는 논라(베트남 전통 모자)를 눌러쓴 뱃사공들이 10명 가까운 승객들을 태우고 운행한다. 한마디로 밤부보트 체험을 선택한 사람들은 전복의 위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배에 타고 하롱베이의 절경을 촬영하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 간혹 숙련된 뱃사공들은 스릴을 위해 선체를 좌우로 흔들며 승객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만 가득하다. 절대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듯이 말이다.
나는 당연히 너무나도 안전한 이 밤부보트를 탈 생각이었다. 내 가방에는 여권은 물론 카메라와 핸드폰까지 들려 있었다. 1년의 여행을 완성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아이템들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생각지도 않은 카약을 주장하고 나섰다. 카약은 밤부보트와 완전히 다르다. 조그마한 배에 승객이라고는 최대 2명이고 직접 노를 저어 나아가야 한다. 그것도 해본 사람이나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지 나처럼 생전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은 몸이 꽉 끼는 배에 올라타는 것만으로도 부담이다. 그런데 아들은 뭐가 그리 쉬운지 여기까지 왔으니 해봐야 한다며 카약 라인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몇 차례 밤부보트가 낫지 않겠느냐는 뜻을 넌지시 비췄지만 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몇 분 후 우리는 빨간색 카약에 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그래도 몇 번 노를 휘저으니 움직이기는 했다.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르고 핸들을 돌려도 움직이던 범퍼카처럼 말이다. 하지만 선로를 유지하거나 다가오는 배를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카약 보다 선체가 세 배 가량 높은 밤부보트가 밀고 들어올 때 드는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전문 뱃사공들이 알아서 피해가 주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별로 그럴 의사가 없어 보였다. 한 번은 밤부보트의 선수가 앞에 타고 있던 아들의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받았는데 그때 나는 정말 이 배가 뒤집히는 줄 알았다. 그럼에도 아들과 나는 엄청난 모험을 잘 끝마쳤다. 그 와중에 붐비지 않는 곳에 배를 띄워놓고 사진까지 찍었으니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낸 셈이다. 다시 선착장에 올라섰을 때 하반신은 홀딱 젖어있었지만 여권도, 핸드폰도, 카메라도 모두 안전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주욱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결과적으로 잘 끝났으니 나는 아빠이자 이 여행의 대장으로써 좋은 선택을 한 것인가? 만약 배가 뒤집혀서 중요한 물건들이 모두 수장되거나 고장 났다면 오랫동안 준비한 이 여행은 어디를 향해 흘러갔을까. 앞으로 이와 비슷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난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늘어섰다. 아들의 용기, 또는 무모함 덕에 또 하나의 좋은 페이지를 만들었음에는 틀림없다. 하롱베이 바다에 아들과 둘이 배를 저어 나가는 시간을 살아생전에 다시 가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난 더 큰 틀에서 이 여행을 바라봐야 한다. 때로는 아이의 젊은 혈기를 눌러서라도 말이다.
누군가 내게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네가 계속 안정 지향적으로 가려고 하는 건, 나이가 들어서거나 용기가 없어서는 아니라고. 물론 내가 나에게도 해줄 수 있는 말이지만 지난 1년 가까운 시간, 혹은 더 일찍부터 자기 최면을 걸며 살아온 삶 때문인지, 이제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에는 내성이 생긴 것 같다. 다음에 내 앞에 놓일 선택의 순간은 무엇일까. 그때는 밤부보트를 선택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