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2(D+27)_태국/방콕
성인이 된 이후 술을 참 많이 마셨다. 그 탓에 부끄러운 실수도 해보고 후회한 적도 많다. 한 때는 술 마신 다음 날의 찜찜한 기분이 싫어 멀리 한 적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또 가까워져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40대가 되고 난 후부터는 술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그런 나이가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소위 말하는 필름이 끊기는 일이 잦아졌는데, 그래서 언젠가부터 그 이상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술 마시는 사람들이 항상 완벽한 자제력을 보이지는 못하니 혹시라도 또 과하게 마신 날에는 가까운 이들에게 어제의 내 상태를 묻곤 했다. 별 일이 없었다는 답을 듣고 나면 그제야 마음을 놓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술이라는 오랜 친구와 절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단 둘이 낯선 곳을 여행하는데 어찌 술을 마실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매일을 도를 닦는 사람처럼 지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도 하루하루가 긴장 속에 지나가고 있지만 출발 전보다는 훨씬 낫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시간은 지나가고 있으니 막연한 두려움 속에 하루를 보내던 때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잠시 멀어졌던 오랜 친구가 다시 떠오른다. 녀석이 왜 나를 찾지 않느냐며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실 수는 없고 하루에 맥주 한두 잔 정도를 하고 있다. 그것도 한 자리에서 두 잔 이상을 마시는 경우는 없다. 많이 마신 날이면 낮에 한 잔, 저녁에 한 잔 정도랄까. 그 정도에 정신이 오락가락할 수준은 아니니 안전 상 문제는 없다. 일일일맥에 대해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날씨가 너무 덥다. 한낮의 뜨거움을 피하려고 이른 시간이나 저녁 시간에 움직이려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덥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땀이 쏙 빠지는데 이때만큼 시원한 맥주가 떠오르는 시간이 없다. 게다가 너무 싸다. 대만에서는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마시지 못했고 베트남 어느 시점부터 시작했는데 콜라나 사이다 보다 싸니 내 입장에서는 맥주를 선택해야 하는 좋은 이유가 된다. 경비절감.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태국은 그렇지가 않다. 아직 하루가 지난 것에 불과하지만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비해 맥주 값이 너무 올라버렸다. 거의 우리나라의 맥주 가격과 비슷한 수준에 가까워졌다고 하면 맞을까. 그러다 보니 음료수와 비교해서 가격 경쟁력이 사라졌다. 맥주를 선택해야 하는 나의 좋은 핑계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오늘은 그래서 낮밤으로 두 잔 마셔야 할 것을 한 잔으로 자제했다. 낮에는 환타를 마셨는데 역시 들척지근한 것이 시원한 맥주와는 비교할 수 없다. 아유타야나 수코타이에 가면 가격이 조금 떨어질까 기대하고 있지만 사실 한 나라에서 술 값이 크게 다를 수야 있겠는가. 그저 나의 기대일 뿐이다.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값싼 맥주를 만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이 한 결 가벼워질 것 같긴 하다.
오늘, 내일 방콕의 카오산로드 주변 숙소에 묵는다. 마치 호찌민의 여행자 거리 주변에서 묵었던 그날과 비슷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니 누군가는 밤새 떠들며 맥주를 마시고 있나 보다. 저 양반들은 체력도 좋네 싶다가도 한 편으로는 상황 신경 안 쓰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워진다. 집으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일일일맥 할 일은 없겠지만 마음 편하게 몇 잔 정도를 마셔보고 싶다. 안주는 계란프라이에 스팸 정도면 대만족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군침이 돈다. 하지만 아직 먼 얘기다. 그때까지는 제발 맥주 값이 저렴하기를 바라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아들은 이 와중에도 값비싼 열대과일 스무디를 한 자리에서 두 잔씩 들이마시고 있다. 좋겠다. 고민거리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