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0(D+63)_네팔/포카라
나와 아들은 숙소에 들어온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내리 잤다. 아들은 내가 깬 다음에도 2시간을 더 잤는데 지난밤의 고단함을 아는 나는 그를 깨울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낮의 포카라를 접할 수 있었다. 날이 흐렸지만 우리가 지나온 인도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 시커먼 매연과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거의 접할 수 없었다. 여행자들로 가득한 거리는 활기가 넘쳤고 고원에 위치해서인지 공기도 산뜻했다. 지금까지 여러 도시를 거쳐왔지만 흔히 얘기하는 한 달 살기를 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곳을 선택할 것 같았다.
우리는 포카라에 머무는 동안 한인 숙소에 묵는다. 트레킹 관련해서 도움을 받고자 결정한 숙소인데 당연히 이곳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있다. 1층에서는 맛있는 한국 음식도 접할 수 있다. 음식에 도전적이지 않은 나와 아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도 많은 한식당을 거쳐왔지만 품질과 가격 면에서 이곳을 따라올 수 없었다. 기회만 되면 고기를 외치는 아들을 위해 오늘도 삼겹살을 주문했다. 삼겹살이 노릇하게 익어갈 즈음 옆 테이블에 있던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이 우리 테이블의 고기를 굽고 있던 사장님께 말씀을 걸어오셨다.
"네팔 삼겹살 맛있나요?"
"여기 고기 좋습니다. 제가 여러 브랜드 팔아봤는데 네팔 돼지고기가 정말 좋아요"
홀로 깐풍치킨을 들고 계시던 어르신은 사장님의 대답에 삼겹살 맛이 궁금한 듯 보였다. 나는 접시를 받아 구워진 고기를 나눠드렸다. 한 점만 달라시기에 정 없다고 석 점을 드렸다. 그리고 고기를 받으신 어르신은 삼겹살 한 조각보다 훨씬 거대한 치킨 두 조각을 우리 테이블로 넘겨주셨다. 수지맞는 장사였다.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삼겹살 맛을 확인하는데 만족하신 듯 보였고 우리는 생각지도 않았던 치킨을 한 조각씩 맛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한국의 문화였고, 한국의 정이었다. 잠시 후 어르신의 테이블에는 아내 분이 합석하셨고 우리 테이블에서는 아들이 씻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여행을 하다 보니 어른들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아들의 수준은 아직 중학교 1학년에 머물러있고 더 높은 수준의 대화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렇다고 영어가 유창하여 만나는 외국사람을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상황도 못된다. 가끔 지나치는 한국인들도 옆에 아들이 있으니 혼자 여행할 때처럼 여유 있게 시간을 갖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말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말 상대가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아들은 자리를 비웠고 뒤에 일정도 없으며, 무엇보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이 옆에 있는 이 상황이 그 갈증을 풀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르신은 아내분과 함께 포카라에 쉬러 오셨다 했다. 이곳은 우리처럼 트레킹을 하러 오기도 하지만 그저 편하게 쉬고자 하는 분들도 찾는 것 같았다.(물론 뒤에 어르신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아내분은 그렇게 따라오고 싶지 않았다 하셨다. 하지만 말씀과는 다르게 얼굴은 편안해 보이셨다.) 나는 아들과 세계일주를 하고 있다 했다. 아직 어리다 보니 비위 맞추기 어렵다는 얘기도 했고 그래서 고단하다고도 했다. 응석이었다. 그저 이 험난한 여행길에서 누군가는 '너도 힘들겠다'라고 공감해 주기를 바랐다. 마음의 소리가 들렸는지 어르신은 옆에 있던 페트병을 들고 말씀하셨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한국에서 수도 없이 듣던 이 이야기를 육십여 일 만에 처음 들었다. 페트병 안에는 양주가 들어있었다. 아이와 다니느라 맥주 한두 잔 이상은 마시지 못했고 그마저도 술이 비싸진 태국 이후에는 거의 입도 안 대고 있었는데 횡재였다. 어르신은 그 후에도 한 잔을 더 주셨고 옆에 계시던 아내 분은 페트병째 주시면서 힘들 텐데 두고 마시라 하셨다. 당신들 것은 방에 또 많다며 말이다. 양주를 즐겨 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저 좋았다. 술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와 정서적으로 교감했다는 느낌을 너무 오랜만에 받아서였을까. 뒤이어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인도 후반전을 다 취소해 버리고 포카라에 3주 정도 머물면 어떨까 하는 생각. 실천에 옮기기 쉽지 않겠지만 생각만 해도 너무 좋을 것 같다. 산뜻한 공기와 조용한 거리 때문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