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3(D+66)_네팔/ABC트레킹 Day2
날이 좋은 날 푼힐 전망대에 서면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푼힐을 지나는 트레킹 코스를 걷는 사람들은 보통 푼힐 아래에 있는 고레파니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가벼운 몸으로 새벽같이 푼힐에 오르는 게 보통이다. 우리도 어젯밤을 고레파니에서 묵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푼힐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지 않고 고도도 300m 남지 올리는 것이라서 따지고 보면 어려운 등산 코스는 아니다. 문제는 이곳이 해발고도 3,200m 지점이라는 것이다. 어제 출발한 포카라가 900m에 위치한 도시니 결과적으로 만 하루 만에 2,300m의 고도차를 견뎌야 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급격히 고도차가 생겼을 때 우리를 습격하는 것이 고산병이다.
오늘 아침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아들은 이 고산병의 쓴맛을 봐야 했다. 그는 어제처럼 가이드 뒤를 바짝 쫓아 걸었고 멀찌감치 떨어져 걸으며 천천히 걸으라 외치던 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사춘기의 투철한 반항심이 히말라야에서도 그 위세를 드러낸 것이다. 사춘기의 무조건적인 저항 정신이 초래한 대부분의 결과가 그렇듯 이번에도 역시 끝이 좋지는 않았다. 그는 푼힐에 도착할 무렵 두어 번의 구토를 해야 했고 겨우 오른 뒤에도 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렵사리 올라선 푼힐이었지만 만족할만한 풍광은 보지 못했다. 그래도 어린것이 고생하며 올라온 노력을 가상히 여겼는지 히말라야는 하늘을 아주 잠깐 열어주었다. 안나푸르나 남봉과 몇몇 봉우리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할 뻔했던 우리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푼힐에서 기대했던 히말라야의 모습을 보게 됐다. 아침 식사 후 고레파니를 떠난 우리는 두 번째 푼힐이라 불리는 타플라단다를 지나게 됐다. 우리가 정상에 도착할 무렵 바람은 구름과 안개를 쓰윽 밀어주었고 그 뒤에 숨어있던 예닐곱 개의 설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른 그 모습을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찬란한 그 모습도 잠시 구름 장벽은 다시 그 앞을 막아섰다. 타플라단다를 지나고도 우리는 한참을 걸었지만 여러 개의 설봉이 만들어내는 절경을 다시 보지 못했다. 오히려 점심을 먹은 이후에는 꼬물꼬물 하던 하늘이 결국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숙소로 향하던 마지막 길은 땀과 비가 뒤섞여 축축한 여정으로 채워졌다.
여행을 길게 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 방문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더 간절하지만 내 간절함 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 세상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연히 다가온 멋진 장면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원하던 것을 보지 못한 것은 모두 잊고 나의 행운을 기뻐하곤 했다. 일일이 헤아려보진 못했지만 원하던 것을 보지 못한 경우와, 뜻하지 않게 만난 선물 같은 기억들을 합쳐보면 0에 수렴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놓친 것들을 아쉬워하며 여행하고 있지만 그만큼 어딘가에서 보상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푼힐에서 보지 못한 모습을 타플라단다에서 만났듯이 말이다.
나는 알 수 없는 히말라야의 날씨를 히말라얀 룰렛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에 머물 닷새 동안은 무언가를 꼭 봐야겠다는 욕망을 조금 내려놓으려 한다. 혹시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보지 못했다면 또 어디선가 아쉬워할 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생각해 보련다. 남은 트레킹 기간 동안 내가 보고 싶은 무언가를 꼭 보겠다는 욕심에 지배된다면 하루에도 천변만화하는 이곳의 자연에 억울함만 쌓일 것 같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히말라야를 그렇게 즐기고 싶진 않다. 그렇게 자연스레 흘러가게 내버려 두면, 또 혹시 아는가. 가장 중요할 때 히말라얀 룰렛이 잭팟을 터뜨려줄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