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0(D+73)_네팔/포카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다. 적벽대전의 승리로 유비가 형주를 얻은 것이 오나라 입장에서는 못마땅했다. 오나라의 군사와 물자가 절대적으로 많이 투입된 전쟁이었음에도 그 과실은 유비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나라의 책사 주유는 계책을 하나 내놓는다. 오나라의 군주 손권의 여동생과 유비를 결혼시킨다는 핑계로 유비를 오나라로 끌어들여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유비는 주유가 예상했던 것처럼 젊은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느라 속절없이 세월을 흘려보냈고 이에 당황한 호위 무사 조자룡은 떠나기 전 제갈량이 쥐어준 비단 주머니를 열어본다. 그가 주머니 속에 적힌 계책대로 조조가 쳐들어오고 있다고 유비에게 알리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유비는 형주로 돌아가게 된다.
포카라에서의 이틀째 휴식일이었다. 오늘도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고 각지에서 모인 여행 고수들과 경험을 공유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체력을 회복한 아들과 나는 점심 식사 후 숙소 근처로 산책을 나갔고 적당한 카페에 앉아 스무디와 커피를 주문한 후 시간을 보냈다. 때마침 구름이 몰려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마저도 운치 있어 보였다. 포카라에서의 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며칠 더 머물고 싶어 졌고 일정 변경을 고려하기에 이르렀다.
아들과 나에게는 이곳이 오나라였다.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숙소도 있었다. 인도로 가는 항공편까지 바꿀 수야 없겠으나 사흘 체류 예정인 카트만두의 일정 정도는 줄여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의 뜻인지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 이유인즉슨 카트만두에 예약해 놓은 숙소 정책상 이미 결제한 숙박료를 환불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긴 여행이다 보니 여행 계획 시점부터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가급적 숙소는 투숙일 기준 사나흘 전까지 환불받을 수 있는 곳들로 예약해 놓았는데 마침 카트만두는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우리를 이곳에 길게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금낭묘계는 다름 아닌 '환불불가'였다.
어쩔 수 없이 포카라에서의 휴식은 오늘로 끝이 났다. 괜히 늘어질 뻔했던 우리의 여행을 '환불불가'가 정신 차리게 해 준 느낌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쉼 없이 달려왔으니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쉬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안타깝게도 이미 결론은 났고 우리는 계획대로 내일 아침 8시에 카트만두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소나울리에서 포카라까지 12시간 이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 고생을 다시 하려니 벌써부터 막막하다. 게다가 포카라에 있는 동안, 그리고 트레킹을 하는 동안은 의지할 곳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움직여야 한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불과 2주 전까지 직접 해오던 것들인데도 그러하다.
우리 숙소의 이름은 '윈드폴'이었다. 나는 히말라야의 어떤 곳에 '바람폭포'라는 지역이 있어 그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장님께 여쭈니 그 뜻이 새로웠다. 윈드폴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바람에 떨어진 과일을 이야기한단다. 그래서 그 의미를 따라가면 뜻밖의 횡재가 된다고 한다. 무지한 영어영문학과는 오늘도 또 새로운 단어를 배웠다. 아무튼 지난 며칠간 나에게 이곳은 이름 그대로 뜻밖의 횡재였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고 좋은 음식도 많이 먹었다. 이제 어디선가 다시 만날 '뜻밖의 횡재'를 학수고대하며 다시 길을 떠난다. 너무 잦은 횡재야 고마운 줄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런 생각지 않은 쉼터가 우리 앞에 등장했으면 한다. 잠시의 쉬어감이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을 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