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5(D+68)_네팔/ABC트레킹 Day4
ABC트레킹을 하루 앞둔 닷새 전 아침, 여행사 사장을 만났다. 트레킹에 필요한 준비물 등을 듣고 사전에 정산해야 할 것들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나게 될 코스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총 7일 중 셋째 날 까지가 조금 어렵고 정상에 가까워지는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은 비교적 쉽다고 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은 출발점과 도착점의 고도차가 500m 이하였지만 그가 쉽다고 이야기했던 날들은 하루에 고도를 1,000m 이상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트레킹 둘째 날, 나는 우리를 이끌고 있는 가이드에게 코스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다. 그의 대답 역시 사장이 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은 고산병만 없다면 크게 무리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두 명의 전문가가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의구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의구심의 발로로 가이드와 협의 끝에 어제 일정을 조금 더 길게 끌고 갔다. 고도를 끌어올리는 나흘째 일정에 부담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우려하던 넷째 날 아침이 밝았다. 지난 이틀은 오후 서너 시까지라도 날씨가 좋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목적지를 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숙소를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출발과 동시에 비와 우박이 조금씩 섞여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설명을 들은 바와 같이 눈에 띄는 내리막은 없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오르지도 않는 듯했다. 가이드에게 따로 묻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걸어 언제 오늘 목표한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2시간쯤 걷고 잠시 쉴 때의 일이다. 아들이 고도계를 들이밀며 벌써 350m를 올라왔다고 하는 것 아닌가. 느끼지는 못했지만 지난 시간 꾸준히 올라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꾸준함'을 이야기하는 책들은 과거에도 요즘에도 그야말로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꾸준함'을 이야기하는 각계 인사들의 인터뷰 영상까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무엇을 이룸에 있어 그저 묵묵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듯하다. 하지만 성공한 이들의 책이나 인터뷰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열심히 해서 그 결과를 목도한 이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실패했을 때의 매몰비용에 대한 부담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결코 결과의 배신을 가져오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산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산이 좋냐 물으면 쉽게 그렇다 답하지 못한다. 나 역시 많은 경우 오르는 것이 두렵고 번거롭다. 그럼에도 살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산을 찾곤 했다. 재수하던 시절 성적이 생각만큼 오르지 않을 때도 그랬고 직장 상사가 터무니없이 괴롭힐 때도 그랬다. 산에 다녀온다고 성적이 급격히 오르거나 상사의 괴롭힘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다시 싸울 힘이 생겼던 것 같다. 산에서는 힘들고 괴로워도 내가 걸은 만큼 이동해 있었고 그렇게 계속 걷다 보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자꾸 걸어 나가면 결국에는 이른다는 이 간명한 이치를 산 만큼 오차 없이 보여주는 존재도 없었다.
아들은 고산병으로 첫날 조금 고생을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이 고단한 여정을 불만 없이 풀어나가고 있다. 그가 내일 ABC에 올라서고 모든 일정이 끝났을 때 히말라야의 장엄한 모습에 대한 감동만큼 결국 해냈다는 자신감 역시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목표만 명확하다면 때로는 헤매고 지쳐 쉬기도 하겠지만 끝내 닿을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1년의 긴 여행 중 아마도 가장 어려운 과정이 될 이 순간들이 아들에게 그런 선물 정도는 내어주길 마음 깊이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