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6(D+69)_네팔/ABC트레킹 Day5
눈을 뜨고 방 밖을 나서니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온통 설국이 되어있었다. 3월에 트레킹을 계획하면서 설경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혹시 몰라 챙겨온 아이젠을 정성스레 신발 밑창에 착용하고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데라울리부터 마차푸라레 베이스캠프(MBC)까지 가는 길 내내 양쪽으로 눈 쌓인 언덕들이 스쳐갔다.(모두 4~5,000m에 달하는 고봉이었지만 우리 가이드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네팔에서 6,000m 이하는 모두 언덕으로 칭한다 했다.) 한 발 떼기가 어려울 정도로 절경이 이어졌고 매순간 사진찍고 감탄하느라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히말라야의 풍광은 빨리 걸으면 위험한 고산병에는 최고의 특효약이었다.
밤새 내린 눈으로는 부족했는지 MBC를 지나자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고도까지 더 높아져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들은 고산 증세가 시작되었는지 허리를 굽혀 쉬는 횟수가 잦아졌고 기다려주는 방법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줄곧 영화 '반지의 제왕'속 프로도와 샘 같았다. 몸집이 작은 아들은 프로도, 그 뒤에서 봇짐을 지고 걷는 내가 샘이었다. 영화 막바지에 어둠의 산을 눈앞에 둔 프로도가 지쳐 쓰러지자 샘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프로도를 들쳐업고 산을 오른다. 나도 영화 속 샘처럼 아들을 옮겨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 역시 그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지친 아들을 보며 스스로 이겨내주길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MBC 부터 걷기 시작한 오르막길이 끝나자 미러 레이크라는 곳이 등장했고 꽁꽁 얼어붙은 호수 뒤편으로 아득히 ABC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ABC를 보며 걷기 시작한지 다시 한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는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4,130m라고 쓰여진 ABC 사인 앞에서 사진을 찍은 아들은 언제 고산병을 앓았냐는 듯이 다시 다람쥐 모드로 숙소까지 뛰어올라갔다. 그렇게 우리는 닷새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트래킹 준비 과정부터 많은 이들이 이야기 했었다. "중학교 1학년은 할 수 없다.", "괜히 아들 고생시키지 말아라." 하지만 우리는 결국 함께 ABC에 도착했고 누구도 낙오하지 않았다.
아들은 잠시 컨디션을 회복하는가 싶더니 이내 급속히 안 좋아졌다. 여전히 남은 고산 증세에 긴장이 풀린 것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 숙소는 어떤 난방 장치도 없어서 체온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밤에 자기 전까지는 산소가 부족하니 숙소 문을 열어 놓으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한 바람이 부는 이 높은 곳에서, 객실 문까지 열고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하라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는 다소 힘겨운 미션같아 보였다. 그 탓인지 아들은 춥다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 느꼈던 희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나에게 안된다고 말하던 사람들 코를 보기 좋게 눌러줬다는 만족감도 잠시, 역시 그들의 말이 옳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꽤나 고된 여정의 연속이다. 400일 가까이 집을 나와 떠돈다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만만한 도전이 아니다. 그런 중에 이런 힘든 여정까지 거치게 되면 아이가 견디지 못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나도 한다. 물론 아들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고 여행을 진행하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그의 한계고 언제 어떻게 그의 상태가 변할지 신처럼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안전주의로 모든 일정을 끌고 가자니 보여 줄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좁아진다. 당장 이 트레킹도 출반 전 부터 이것저것 긴 시간을 준비했지만 결국은 탈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부족한 아버지인가'라고 되묻게 된다. 이 여행은 처음 부터 끝까지 아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과 이룰 수 있는 성취 사이에서의 고민이다. 나는 그 사이 어디에서 때로는 잘못 된 선택으로 아이에게 고통을 주거나 혹은 보여 주고 싶은 것들을 놓치곤 한다. 이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여행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고통이다.
아들은 지금 옆에서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물통 두개를 끌어안고 잘 준비를 하고 있다. 옷은 반팔티부터 중량 패딩까지 수겹을 겹쳐 입었고 성능은 좋지 않지만 핫팩도 붙였다. 이 열악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한 대책을 강구했다. 과연 그는 오늘 밤 잘 잠들 수 있을까. 내일은 하산이지만 가장 긴 시간의 산행이 기다린다. 트레킹은 정상이 끝이 아니라 하산이 끝이며, 완전히 내려온 뒤에야 성공적이었는지 평가할 수 있다. 아들이 내려가는 내내 고생 한다면, 돌아가서도 며칠을 앓아 눕는다면 난 이 트레킹을 성공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부디 내일 아침 아들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