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7(D+70)_네팔/ABC트레킹 Day6
어젯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나와 아들은 반팔티에 긴팔을 겹쳐 입고 다시 목토시를 착용한 후, 경량패딩, 중량패딩, 그 위에 등산재킷까지 입었다. 계속 춥다 하는 아들에게는 1리터 들이 물병 2개에 따뜻한 물을 받아 난로 대용으로 안겨주었다. 그리고 핫팩을 양발에 붙이고 침낭 속으로 들어간 후 숙소에서 제공한 유일한 방한 도구인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4천 미터가 넘는 고산에 찬바람을 맞으며 난방기구 하나 없이 쓸쓸히 서 있는 건물은 우리를 추위로부터 전혀 지켜주지 못했다. 밤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고 나는 몇 번씩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맞춰놓은 알람이 울린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몸 상태는 엉망이 되었지만 히말라얀 룰렛은 가장 중요할 때 내 편을 들어주었다. 마차푸차레 뒤편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위치상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지만 강렬한 햇살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둘러싼 봉우리들을 노랗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모진 고초를 겪으며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표정과 포즈를 취하며 압도적인 자연의 변화와 함께 순간을 남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69일째 밤은 여행을 시작하고 가장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70일째 아침은 더없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유가 넘치던 일출 조망의 시간이 끝나자 현실은 빠르게 다가왔다. 우리는 오늘 사흘에 걸쳐 올라온 거리를 하루 만에 내려가야 한다. 이동 시간은 트레킹을 시작하고 오늘이 가장 길다. 대부분이 내리막이라 하지만 닷새의 산행 뒤에 다시 하루 종일 걷는 일정은 만만치 않다. 나도 나지만 이렇게 긴 시간 산에 갇혀있었던 적이 없는 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어젯밤 우리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지 않았는가. 모든 악조건이 겹쳐져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렇다고 푸념만 늘어놓고 앉아있을 수는 없으니 정해진 시각에 출발했다. 불과 하루, 이틀 전에 올라온 길인지라 눈에 익는다. 오를 때 내려오던 이들을 보며 보냈던 우리의 부러운 눈길을 오르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서 읽는다. 오늘 우리가 내려가는 고도는 자그마치 2천 미터. 지리산 꼭대기부터 해수면까지 내려가도 부족한 높이다. 혹자는 물을지 모른다. 오르는 것도 아니고 내려가는 것이 무어 그리 힘드냐고. 계단 몇 개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발톱, 발목, 무릎 하반신의 모든 부위에 무리가 온다. 계속 내려가는 것도 죽을 노릇이다. 오죽하면 가끔은 다시 오르고 싶었을까.
절반 정도 내려오자 쌓인 눈이 녹아 흙길을 적시기 시작했다.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잠시 잊혔던 히말라야의 동물들과 그들의 배설물도 우리의 앞길을 수놓았다. 계절은 다시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두꺼운 옷을 벗어 다시 배낭을 추슬렀으며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착용했던 아이젠도 벗어던졌다. 어젯밤의 악몽 같던 추위는 기억에서 사라졌고 어느새 송골송골 땀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히 아들은 봄의 영역에 들어서자 컨디션을 회복했고 이번 트레킹에서 늘 그랬듯 가이드 선생님 뒤에 바짝 붙어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뒤에 한참을 떨어져 봇짐을 지고 걸었다. 앞에 걷든, 뒤에 걷든 온몸이 쑤시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계절을 건넌 우리의 산행은 저녁 5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점심 먹은 시간을 제한다 해도 9시간 가까이 끊임없이 걸은 것이다. 숙소 주인은 아들을 향해 스트롱맨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로써 고난의 행군도 모두 끝이 났다. 내일도 물론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지만 지난 시간들에 비할 바 아니다. 걷기 어렵다면 기어서라도 내려갈 수 있다. 여전히 해발 2천 미터고 밤은 쌀쌀하지만 오늘 밤은 편하게 잘 수 있을 듯하다. 다시 포카라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