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함께 애자일을 (3화)
“오늘은 안녕하신지요?”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입니다.
지난 만남에서는 매일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창조해낼 수 있는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무겁고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어찌 하다 보니 그리 되었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삶을 그리 무겁고 심각하게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요?
우리는 가끔씩 착각을 합니다. 가벼우면, 진지하지 않다는 착각을요. 허나 이는 잘못된 편견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한없이 천진난만하고 경쾌하지만, 그들의 호기심은 자못 진지합니다. 제가 무겁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눠드린 것과는 별개로, 여러분들의 삶은 부디 어린 아이처럼 경쾌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다만 행복 그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삼을수록 되려 삶이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행복의 역설’을 아시는지요? ‘행복하자’고 마음 먹을수록, 마음 속 무의식 저편에서는 ‘사실은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아!’라는 인식을 더욱 깊숙이 각인시키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행복을 쫓지 말고, 여러분의 삶의 과정과 경험 자체를 즐기고 그 속에서 보다 많이 행복감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끔 ‘삶 속에서의 행복 느끼기’가, ‘영화 즐기기’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물론, 영화 산업이 1900년대에 들어와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제 육신이 살아있던 그 이전의 시대에는 영화를 즐길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여러분들이 말하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쾌(快)’보다는 ‘위버멘쉬(Übermensch)’의 행복만을 더욱 강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좀 더 일찍 개발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물론 여러분의 오늘 속에 함께 살고 있는 저는 요즘, 영화와 드라마를 즐기며 위버멘쉬의 행복과 함께 소확행도 만끽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드라마를 하나 소개시켜 드릴까요? (비록 저의 몸은 이 세상에 없지만, 저의 영혼은 여러분의 오늘 속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얼마 전 ‘파울로 코엘료 (Paulo Coelho)’라는 작가가 극찬해서 찾아 보게 된 한국 드라마 ‘My Mister(나의 아저씨)’가 바로 그것입니다. 삶 속에서 발생하는 불쾌(고통)에 치이고 휘둘리고 종속되어 자신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힘겹지만 이를 마주하고 넘어서서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힘에의 의지, Will to Power)를 갖고 긍정적인 삶의 차이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위버멘쉬’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잘 담겨져 있더군요! 제가 지난번 만남에서 그렇게 무겁고 길게 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섬세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해 내다니! 저 역시 이 드라마를 보고 K드라마의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 ‘삶 속에서의 행복 느끼기’가 ‘영화 즐기기’와 어떠한 면에서 유사한 지에 대해 살펴봅시다. 우리는 영화가 진짜 이야기가 아님을 잘 압니다.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영화도 있지만 그 또한 배우를 통해 재현된 이야기이고, 심지어 대부분의 이야기는 모두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 속의 그 상황과 배우의 감정에 몰입하여 그 것을 마치 실제 내 이야기인 것처럼 공감하기도 하고, 때론 한 발짝 떨어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지를 헤아리기도 합니다. 배우의 시각에서 상황에 몰입하기와 감독의 시각으로 전체를 조망하기를 넘나들며, 재미와 의미의 이중주를 즐기는 것이지요.
행복 학자들은 이를 각각 ‘쾌락적(hedonic) 행복’과 ‘자아실현적(eudaimonic) 행복’으로 구분하더군요. 사실 쾌락주의적 관점에서 행복을 탐구하는 학자들은, ‘쾌락’이라는 단어가 갖는 부정적 느낌 때문에 이보다는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긴 합니다. 어찌됐건, 이는 우리가 앞서 이야기 했던 일상 속의 ‘쾌(快)/소확행’과 삶의 근원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큰 행복’, 또는 ‘재미’와 ‘의미’와 맥을 같이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 ‘감각에 몰입하기’와 ‘메타인지(meta-cognition)로 조망하기’를 조화시키는 것이지요. ‘메타인지’란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시다시피 ‘생각에 관한 생각’으로, 어떠한 상황을 한발짝 물러나 보다 큰 시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명상 훈련법도 두 가지 접근이 모두 다 있는 것으로 압니다. 나의 호흡과 숨 그리고 오감과 말초적 감각에 집중하는 몰입 명상과, 나의 머리 속에 어떠한 생각들이 떠도는지를 한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메타인지’적 명상이 바로 그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과거의 저는 ‘쾌락적 행복’보다는 위버멘쉬의 ‘자아실현적 행복’을 더욱 강조해왔었지만,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요즘의 저는 두 접근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에 온전히 몰입하고 머물 때 평소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여러 가지 말초적 감각까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며, 이러한 온전한 경험을 하는 순간 동안에 그간 느끼지 못했던 많은 기쁨과 감사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에는 비단 햇살의 따사로움, 바람의 간지러움, 싱그러운 풀 냄새, 새소리의 경쾌함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감각 뿐만이 아니라, 인간 관계는 물론 심지어는 업무에 몰입하고 성취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각까지 모든 경험이 포함됩니다. 한편, 이런 순간에 감각에 몰입하지 못하고 늘상 한발 짝 물러나 메타인지적 관점만을 취하게 된다면 그 감정은 반감되고 맙니다. 영화에 몰입하여 눈물을 찔끔 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지금 울어?’라고 그 흥을 깨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감각에 몰입하지 않고 한발 짝 물러나 메타인지적 관점을 갖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견디기 힘든 ‘불쾌(고통)’의 순간에서는 불쾌의 감각에 함몰되어 있기보다는, 이를 한발 짝 물러나서 바라보는 것이 불쾌의 감각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메타인지적 관점은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상황을 객관화함으로써 다양한 시각으로 ‘목적과 의미’를 보다 심도 있게 조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첫번째 만남에서 소개 드렸던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려 보세요. 주인공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화려한 SF 모션을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영화 속에 담으려 했던 감독의 철학 세계관을 메타인지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의미를 곱씹는 재미는 그 이상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행복 중 굳이 한쪽에만 치우치기 보다는, 둘 모두를 향유하기 위해 ‘감각에 몰입하기’와 ‘메타인지(meta-cognition)로 조망하기’를 적절히 조화시키고 필요에 따라 취사 선택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더욱 충만해 질 것입니다.
오늘은 삶 속에서의 재미와 의미를 보다 충만하게 만끽하기 위한 방법으로, 감각에 몰입하기와 메타인지적으로 조망하기의 조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의 만남에서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감각과 메타인지를 오고 가며 그 재미와 의미를 모두 충분히 즐기기 위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과거에 살았던 니체가 아닌 여러분들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여러분의 행복과 안녕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