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박성진 Oct 21. 2021

차이와 반복, 수처작주(隨處作主)

니체와 함께 애자일을 (2화)

“오늘은 안녕하신지요?”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입니다.


 지난 만남에서는 ‘오늘’의 무한한 반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이후의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요? 매일 매일의 삶이 새로움과 열정으로 가득했는지요?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 허나 이와 반대로,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힌 듯한 갑갑함을 느끼진 않으셨는지요? 


<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중 >

 

 오늘도 영화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 혹시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원제는 ‘Groundhog Day’로 1993년도에 나온 영화입니다. 200살이 가까워지는 저에게는 최신 영화에 속하지만, 여러분들께는 좀 오래된 영화겠지요? 원제인 ‘Groundhog Day’는 ‘성촉절(聖燭節)’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놀라 깨어난다는 ‘경칩(驚蟄)’과 유사한 날입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매년 2월 2일 성촉절이 되면 개구리 대신 ‘그라운드호그(Groundhog)’라는 두더지처럼 생긴 동물의 행동을 보고 봄이 오는 것을 점 치는데요, 그라운드호그가 굴에서 나와 자기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 다시 자기 굴로 들어가게 되면 봄이 아직 멀었다고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봄이 곧 시작된다고 보는 풍습이 있다더군요.

  이 영화는 기상 캐스터 '빌 머래이(Bill Murray)'가 성촉절 행사를 촬영하고자 방문한 시골 마을에서, 이 날이 매일 매일 무한 반복하게 되는 현상을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어찌 하셨을까요?
 주인공 빌은 여러분과는 다르게(그렇게 믿겠습니다!), 주어진 하루를 그냥 막 되는 대로 살아 버립니다. 이성 유혹하기, 돈 훔치기, 축제 망치기 등 반복되는 하루를 낭비 하듯 그냥 막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또한 곧 지겨워지고, 반복되는 오늘로부터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갑갑함과 절망감에 결국 자살을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다음 날이면 영락없이 침대 위에서 눈을 뜨며 또다시 오늘을 시작하게 됩니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요.
 영화의 끝이 어떻게 되었냐고요? 여러분들이 이 영화를 꼭 한번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그 재미를 미리 반감 시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살짝 언급을 드리자면, 오늘이 반복된다고 해서 ‘어제의 오늘’과 ‘오늘의 오늘’, 그리고 ‘내일의 오늘’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이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제의 오늘’과 ‘오늘의 오늘’, 그리고 ‘내일의 오늘’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가 ‘A/B/C’로 구분한 일의 유형에 대해 살펴봅시다.


 1) 우리가 늘상 하는 일은 ‘A 유형’의 일에 해당합니다.
 2) ‘B 유형’의 일은, ‘A 유형’의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개선하는 일이지요.
 3) ‘C 유형’의 일은 한발 더 나아가, 개선(‘B 유형’의 일)을 어떻게 더욱 개선할 것인가에 관한 일입니다.

<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구분한 일의 3가지 유형 >


 이러한 분류로 볼 때, 우리가 하루 하루를 ‘A 유형’의 일로만 가득 채운다면, ‘어제의 오늘’과 ‘오늘의 오늘’ 그리고 ‘내일의 오늘’은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제의 오늘’을 바탕으로 ‘B와 C 유형’의 성찰과 개선을 더해 간다면, 비록 오늘의 일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지라도 이를 대하는 우리 자신은 ‘어제의 오늘’과는 분명 다른 차이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늘이 반복될수록 그 차이는 점점 더 커지겠지요.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봅시다. 지난번 만남에서 우리는 세상을 직접 바라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를 재해석하여 우리 나름의 세상 모형(model)을 머리 속에 재구성하고 이러한 정신 모형(mental model)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무수히 ‘반복’하며 B와 C유형의 성찰과 개선을 통해 이 정신 모형을 새롭게 갱신하고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의 석학 윤정구 교수께서는 이러한 정신 모형을 좀 더 세분화하여, ‘정신 모형 I’과 ‘정신 모형 II’로 구분하고 있습니다.[1]  ‘정신 모형 I’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던 경험들을 바탕으로, 현재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정신 모형입니다.  한편 ‘정신 모형 II’는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위해 만드는 정신 모형입니다.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간에 우리 모두는 현재의 세상을 바라보는 ‘정신 모형 I’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정신 모형 I’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설사 인지하고 있을 지라도 이것이 실제로 자신이 ‘행하는(in use) 모형’이 아닌 말로만 선언하고 ‘표방(espoused)하는 모형’인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실제로 행하는 모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를 행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표방하는 모형’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표방하는 정신 모형 I’과 ‘실제 행하는 정신 모형 I’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혀가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한편, ‘정신 모형 II’는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 이 삶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다룰 것이지 등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북극성과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디로 향해 나아갈 것 인지에 대한 미래의 자신의 목적지를 투영하는 ‘정신 모형 II’를 제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  ‘표방하는 정신 모형 I’과 ‘실제 행하는 정신 모형 I’ 사이의 간극(언행 불일치)이 단순히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인지, 혹은 더 나은 상태(정신 모형 II)로 나아가기 위한 ‘창조적 긴장’인지의 분별은, ‘정신 모형 II’의 유무와 ‘표방하는 정신모형 I’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정신 모형 II’를 향하는 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정신 모형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이야기 하다 보니 정신이 좀 혼미해지는 듯 하는군요.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제가 독일인인 것은 아시죠? 그리고 제 모국인 독일은 한 때 광학(렌즈)과 카메라로 무척 유명했었다는 사실도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사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경쟁자가 전무할 정도로 독일이 카메라 시장을 독주하였지요.
 헌데 일본이 곧 카메라 시장에 뛰어들었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독일과 우위를 가르기 힘들 정도의 수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특히 당시에는 렌즈의 밝기를 얼마나 밝게 만들 수 있느냐(어두운 곳에서도 얼마나 밝고 선명하게 찍을 수 있느냐)가 카메라 회사의 기술 경쟁력을 대표하였는데, 자존심 상하게도 일본의 캐논(Canon) 사에서 f/0.95라는 놀라운 밝기의 렌즈를 출시하게 됩니다. 제가 카메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긴 하지만 ‘f/’다음에 표기된 숫자값이 작을수록 더 밝은 렌즈이고, 사람 눈을 렌즈의 밝기로 표현하자면 f/1.0 정도라고 하더군요. 숫자로만 본다면 캐논 f/0.95 렌즈는 어둠 속에서 사람이 보는 것보다도 더 잘 보이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독일의 '칼 자이스(Carl Zeiss)'라는 회사도 자극을 받아, 내부용으로 ‘슈퍼 Q 기간타르 f/0.33’라는 상징적인 프로젝트성 렌즈를 디자인하게 됩니다. 허나 이 렌즈는 실제로 기능하는 상용 제품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의 프로토타입으로 제작된 모형 렌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밝은 렌즈가 개발되었다'라는 소문이 또다른 소문을 낳으며 일파만파 커졌고, 그 프로토타입 렌즈는 어느새 회사 밖으로 빠져나와 경매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렌즈는 2011년 한 경매장에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세계에서 가장 밝은 렌즈’라는 평가와 함께 한국 돈으로 약 1억원이라는 거액에 낙찰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이 이 소문을 듣고 ‘우주(어둠 속)에서 사용할 가장 밝은 렌즈’를 자이스 사에 요청하게 됩니다.


< 칼 자이스 슈퍼 Q 기간타르 40mm f/0.33 렌즈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


 만약 여기에서 끝났다면 이는 희대의 사기이자 해프닝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이스는 사기를 치기 위해 이 렌즈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갈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 시각화하고 그 씨앗을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비록 당장은 현실과의 격차가 있을지라도 이를 향한 진심과 의지는 분명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이스 사는 나사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고, 비록 ‘슈퍼 Q 기간타르 f/0.33’의 성능에까지는 못 미치지만 수년 간의 노력 끝에 결국 캐논 f/0.95보다는 밝은 f/0.7 렌즈를 만들어 나사에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렌즈가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밝은 렌즈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를 앞서 이야기하던 ‘정신 모형’의 관점에서 볼 때, 자이스가 처음 만든 '슈퍼 Q 기간타르 40㎜ f/0.33’라는 모형 렌즈는 미래를 대표하는 <정신모형II>를 상징하고, 자이스가 표방하는 것들은 진심으로 이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현실 격차는 위선이나 사기라기 보다는 ‘창조적 긴장’으로 볼 수 있으며, 실제로 그들의 꿈은 머지않아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우리는 오늘을 무수히 ‘반복’하며 B와 C유형의 성찰을 통해 ‘정신 모형 I’을 새롭게 갱신하고 ‘정신 모형 II’를 더욱 선명하게 하며 ‘어제의 오늘’과는 다른 또 다른 오늘의 ‘차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헌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처럼 ‘정신 모형 II’가 모두에게 선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미래에 대한 ‘정신 모형 II’가 선명하신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이는 마치 짙게 드리운 안개 속에서 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자동차는 멈출 수 있지만 삶은 멈출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하기에 안개가 끼어 멀리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일 지라도, 우리는 바로 코 앞만이라도 바라보며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 모형 II’가 선명하지 않더라도 가설적으로 ‘정신 모형 II’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놓고, 조금씩 나아가며 후(後)사건적 성찰을 통해 이를 조정하고 구체화하면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를 ‘애자일 플래닝(agile planning)’이라고 한다지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나만의 정신 모형 II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때, 한 때는 쇼펜하우어를 나의 ‘정신 모형 II’의 모델로 여기고 열렬히 추종한 적도 있었고, 또 한 때는 바그너를 그렇게 쫓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나아갈 길이라고 굳게 믿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찾던 길이 아니라면, 그 간의 시간과 노력들은 모두 낭비 아니냐고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번 만남에서 누차 말씀드렸지만, 이 모두는 나의 다양성이자 경험으로 내 안에 쌓입니다. 내 안에는 여전히 쇼펜하우어도 있고, 바그너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모습의 나를 바탕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저만의 세상을 만든 제가 또 탄생한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여러분께 부디 당부 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조급한 마음에 동시에 여러 정신 모형 가설을 세우고 이 모두를 병행하여 탐색을 하기보단 하나씩 충분히 음미하기를 바라며, 또한 가설을 세운 뒤에 너무 성급히 판단을 내리고 경로를 곧바로 수정하기보단 충분히 몰입할 시간을 갖길 제안 드립니다. 정신 모형 II를 찾는 것은 마치 연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소울 메이트(soulmate)를 찾는데, 동시에 여러 명을 사귀면서 비교를 한다거나 혹은 몇 번 만나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진정한 소울 메이트를 찾는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바램이 있다면(너무 욕심이 많은가요?), ‘정신 모형 II’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모형이기 보단, 내가 좋으면서도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모형이었으면 합니다. 나를 희생하여 타인을 이롭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를 이롭게 하되 더 나아가 나만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를 막상 꺼내 놓고 보니 길어질 것 같군요. 이 이야기는 일단은 여기서 잠시 접어두고, 나중에 좀 더 심도 있게 나눠보도록 하시지요.


 지금까지, 매일의 반복 속에서도 차이를 만들어 내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매일의 반복 속에서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왜 중요한 일일까요? 굳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더라도, 매일의 반복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것 만으로도 충분하진 않을까요?

 무수히 반복되는 오늘 속에는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발생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행복’과 ‘불행’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지만, 저는 조금 더 극단적인 표현으로 이를 단지 ‘쾌(快)’와 ‘불쾌(不快)’라고 부르고 싶군요. 이러한 ‘쾌’, 다시 말해 여러분이 말하는 소소한 행복도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쾌는 상황에 따라 많은 제약이 따르고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편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명확함과 합리성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품습니다. 물론 이 또한 부조리한 것이 아닙니다. 알베르 까뮈에 의하면, 부조리는 세상 그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러한 비합리적인 세상과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간이 함께 맞대면 하는 데에서 발생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번에는 US오픈 테니스 대회 최초의 흑인 우승자인 '아서 애쉬(Arthur Ashe)'의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테니스는 원래 백인 귀족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흑인은 아예 테니스 경기에 참가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던 적도 있지요. 하지만 그는 그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하고 흑인 최초로 1968년 US오픈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게 됩니다.
 허나 그는 1983년 심장 이상으로 수술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수혈 받은 혈액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이 되고 맙니다. 그가 세계 테니스 메이저 대회에서 흑인 최초로 우승을 한 것을 '행복', 에이즈에 걸린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이를 굳이 '행복'과 '불행' 대신에 '쾌'와 '불쾌'라고 지칭하고자 하는 이유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단어에는 그것이 '끝'이라는 느낌이 함께 내포되어 있는 듯한 아쉬움을 못내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명언을 통해 좀 더 그 의미를 살펴볼까요? 


내가 윔블던에서 우승해 테니스 챔피언이 되었을 때 신께 '왜 나입니까?'라고 묻지 않았듯이, 내가 에이즈에 결렸을 때도 나는 '왜 나입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 아서 애쉬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

 

 실제로 그는 1968년 US오픈 우승에 머물지 않고, 1970년 호주 오픈 우승에 이어, 1975년 테니스의 종주국인 영국에서의 윔블던 대회 우승까지 연달아 석권하게 됩니다.
 한편, 에이즈에 걸린 후에도 이에 좌절하기 보단 에이즈 퇴치를 위한 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물론, 인종차별 개선을 위한 인권 운동에도 전념하게 됩니다.
 그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전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쾌' 혹은 '불쾌(고통)'라는 기준에 종속시켜, 자신의 삶을 '행복'한 것이냐 '불행'한 것이냐로 단정 짓지 않았습니다. 삶 속에서 발생하는 '쾌'와 '불쾌(고통)'를 있는 그대로 인정(긍정)하되 그것에만 종속되지 않고(그것을 끝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고 힘(power)이 되어 이러한 '쾌'와 '불쾌(고통)'를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차이를 창조해 낸 것입니다. '쾌'와 '불쾌'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수처작주隨處作主) 힘이 되고자 하는 의지(힘에의 의지, Will to Power)가 중요한 것이며,이를 통해 자신만의 삶의 차이와 정당성(가치와 의미)을 만들어 내는 행복이 ‘쾌’보다 더 주체적이고 지속 가능하며(sustainable)큰 행복일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며,‘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만남의 글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등장인물 사이퍼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러한 행복을 거부하고 쾌를 쫓는 선택을 한 행동은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물론 앞서 언급 드렸듯이 삶 속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행복(쾌)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생이란 것이 짓궂게도 늘 좋은 일만 생길 수는 없기에 이렇게 삶 속에서 발생하는 '쾌'와 '불쾌'에 너무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다 보면, 자칫 '쾌'보다 '불쾌'의 빈도가 더 많거나 또는 견뎌내기 힘든 '불쾌(고통)'와 마주했을 때 그 앞에서 맥없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수동적인 ‘쾌’를 뛰어넘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큰 행복(불쾌의 상황에서도 이를 담담히 마주하고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자신만의 긍정적인 삶의 차이를 창조하는 기쁨)에 대해 좀 더 강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일명 '소확행')도 키우되 너무 여기에만 쏠리지 말고,  부디 이를 뛰어넘는 보다 주체적으로 삶을 긍정하고 차이를 만들어 내는 행복에도 힘을 실어 행복의 균형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행복입니다. 불쾌(고통)를 마주했을 때 이를 담담히 마주하고 이를 넘어서서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긍정적 삶의 차이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쾌와 불쾌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속성을 뛰어넘는다(over man)는 의미로 독일어로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이름을 붙이긴 했으나, 이것이 마치 초인(超人)이나 슈퍼맨(superman)만이 가능한 초능력처럼 여겨지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이는 의지와 노력, 그리고 구조화를 통해 누구나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기에 만인을 위한 능력이기도 하고 또 그러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쉽게 갖출 수 있다고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것에는 십분 동의합니다.


 한 가지 팁을 더 드리자면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능력이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첫째로는 정신 모형을 인지하고 성찰할 수 있는 메타인지력(meta-cognition)이 필수적이고, 둘째로는 정신 모형이 고정된 도그마가 아닌 변화 가능한 일종의 관점이자 가정이자 이미지(심상)라는 것을 염두해 둔 개방성과 유연성,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정기적으로 정신 모형을 갱신할 수 있는 성찰과 회고의 구조화(제도 및 시스템)가 그것입니다.


 오늘은 매일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차이’에 대해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무 무겁게 말씀을 드린 것 같아 제 마음도 좀 무거워지려 하네요. 앞서 소개 드린 ‘사랑의 블랙홀(원제: Groundhog Day)’이라는 영화를 보시며, 주인공 빌이 어떻게 반복되는 매일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 가는 지를 보시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질 수도 있겠다는 심심한 위로를 드리며, 저는 또 다음의 오늘에 만나 뵐 것을 약속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이상, 과거에 살았던 니체가 아닌 여러분들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여러분의 행복과 안녕을 빕니다!



[1] 『진성리더십』 (윤정구 저 / 라온북스)



이전 01화 오늘을 사랑하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