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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박성진 Oct 20. 2021

오늘을 사랑하라

니체와 함께 애자일을 (1화)

“오늘은 안녕(安寧)하신지요?”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입니다.


 오늘은 '오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 보려 합니다. 혹시 ‘디지털 트윈’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디지털 트윈이란, 현실 세계의 물리적 대상을 컴퓨터 속의 가상세계(디지털)에 똑같이 구현하여 이 가상 쌍둥이(트윈)를 통해 현실 세계 속의 대상을 해석하고 예측하고 제어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사실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를 직접 느끼고 이해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느끼고 바라보는 현실 세계는 우리 머리 속의 인식 세계 안에서 재구성되고, 우리는 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우리 머리 속의 인식 세계에서 재구성된 세상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우리 뇌는 디지털은 아니니깐 ‘인지적 트윈(cognitive twin)’이라고나 할까요? 또는 ‘정신 모형(mental model)’이라는 용어도 의미하는 바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세상을 직접 바라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를 재해석하여 우리 나름의 세상 모형(model)을 머리 속에 재구성하고 이러한 정신 모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 데카르트 극장 (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artesian_theater  ) >


 자, 이런 관점에서 ‘어제→오늘→내일’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제가 쌓여 오늘을 만들고 오늘이 쌓여 내일을 만드는, ‘시간’이란 관념에 대한 ‘선형적인(linear) 모형’이 대부분의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 모형일 겁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오늘에 비해 어제는 늘 미흡하고, 내일에 비해 오늘은 늘 미숙합니다. 그렇다 보니 미흡하고 미숙했던 과거에 너무 묶이다 보면 오늘이 ‘후회’에 사로잡히고 되고, 찬란할 미래에 너무 메이다 보면 오늘은 ‘불안’과 ‘착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어떠한가요? 과거에 대한 후회로 묶여 있나요? 아니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오~력(스스로에 대한 착취)’으로 채우고 계신가요?


< 시간의 선형적 모형 >


 이러한 ‘시간에 대한 선형적인 모형’도 실제 현실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발명(?!)해 낸 하나의 해석 프레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간에 대한 또다른 해석 모형을 하나 제안해볼까 합니다. 일명 ‘영원 회귀적 모형’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간이 ‘어제→오늘→내일’로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오늘→(오늘의)오늘→(내일의)오늘’로 ‘오늘’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모형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어제의 오늘’은 ‘오늘의 오늘’의 미흡한 과거가 아닌, ‘오늘의 오늘’과는 또다른 오늘이자 다양성입니다. 그러하기에 어제의 미흡함과 미숙함을 오늘의 후회로 남기는 대신, ‘어제의 오늘’은 오늘의 성장을 위한 과정과 경험으로 기억(해석)을 재창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론 나의 의지와 하등 상관없는 마음 아픈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조차도 아픔과 괴로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이를 성장통으로 재창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그렇게 힘겹고 지리하고 의미 없던 군생활이, 수년이 지나서는 화려한 무용담으로 재창조되게 되는 것을 여러분들도 직간접적으로 많이 체험해 보셨지요?


< 시간의 영원 회귀적 모형 >


 ‘내일의 오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찬란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철저히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속에 새로운 오늘(내일의 오늘)을 위한 다양성의 씨앗은 뿌리되, 오늘은 오늘로서의 의미가 있고 ‘내일의 오늘’과는 또다른 오늘이자 다양성입니다. 그러하기에 내일을 위해 오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 심지어는 이와 반대로 오늘을 위해 내일이 존재할 수도 있게 됩니다. ‘피드백(feedback)’이란 말은 많이 들어 보셨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어떠한 일이 일어난 후에 그것에 대해 성찰을 하는 후사건적 성찰을 의미합니다. 한편 ‘피드포워드(feedforward)’는 어떤가요? 어떠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 미래에 대해 미리 생각해보도록 하여 미리 대응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전사건적 성찰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 속에 내일의 씨앗을 뿌린다는 의미는 찬란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철저히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오늘로 가지고 와서 오늘을 더욱 충만하게 하여 오늘을 위해 내일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제의 오늘’과 ‘오늘의 오늘’ 그리고 ‘내일의 오늘’은 단반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쌍방향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시간에 대한 ‘선형적 모형’이 실제 현실이 아니고, 이러한 저의 ‘영원 회귀적인 모형’이 실제 현실임을 어떻게 장담하느냐고요? 저는 제 모형이 실제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인지는 정작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야구 경기에서 '2사(아웃) 만루'의 위기를 맞은 투수가 강판되고, 새로운 구원투수로 교체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의 객관적인 실제 현실은 ‘2사 만루’라는 상황입니다. 헌데 두 투수의 머리 속에는 이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해석이 존재합니다. 강판되는 투수의 머리 속에는 ‘여기서 실수를 한 번만이라도 더 한다면 모든 게 끝장나는 위기 상황이야’라는 해석이 있는 반면, 새로 등판한 구원투수의 머리 속에는 ‘여기서 하나만 잘 막아내면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상황이야’라는 해석이 존재하지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2사 만루’라는 객관적인 실제 현실이 무엇이냐 보다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해석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영화 ‘매트릭스’ 중 ‘사이퍼(Cyper)’가 가상 현실에서 고기의 풍미를 음미하는 장면 >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요? 영화 ‘매트릭스(Matrix)’에서는 기계가 사람을 지배하고 이들을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 에너지원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영화 속의 실제 현실입니다. 한편 매트릭스는 사람들의 뇌와 연결되어 가상 현실을 투영하고, 인큐베이터 속의 사람들은 마치 이 가상 현실 속의 삶이 실제 삶인 것처럼 착각을 하며 삶을 영위합니다. 하지만, 몇몇의 사람들이 인큐베이터로부터 빠져 나와 기계에 저항을 합니다. ‘사이퍼(Cypher)’라는 인물도 이러한 저항군 중 한 명이지요. 허나 사이퍼는 실제의 삶이 더 참혹하고 불행하며, 차라리 과거의 가상 현실이 더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가상 현실이 실제 현실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보다 행복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가상 현실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사이퍼가 배신자 취급을 받기도 하고(나중에 다시 설명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저는 이러한 사이퍼의 선택을 지지하지는 않으며, 여기에서는 다만  '인식의 세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이러한 저의 ‘영원 회귀적인 모형’이 이단처럼 여겨지기도 하겠지만(그래서 누군가는 저를 위험한 철학자라고도 하더군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여러분이 조금 더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입니다. 무엇이 실제인지의 논쟁을 떠나, 우리가 실제라고 여기는 우리 머리 속의 ‘인지적 트윈’을 우리가 보다 충만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신 모형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2사 만루’의 상황에서 여러분이 좌절하기보다 자신감 충만한 구원투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제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 여러분께 드린 인사말이 기억나시는지요? 네 맞습니다. “오늘은 안녕(安寧)하신지요?”라고 여쭈었습니다. 어제의 미흡함과 미숙함을 오늘의 후회로 남기는 대신 ‘어제의 오늘’을 오늘의 성장을 위한 과정과 경험으로 재창조함과 동시에, 찬란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철저히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속에 새로운 오늘(내일의 오늘)을 위한 다양성의 씨앗은 뿌리되, 오늘을 오늘로써 충만하게 살고 계신 지를 여쭌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제(후회)로부터 편하고(安: 편안할 안) 또 내일(불안과 착취)로부터 편한(寧: 편안할 녕) 채로 오늘을 잘 지내고 계신 지를 여쭌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국말을 잘 못해서 한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편안하다’라는 말은 ‘몸이나 마음이 거북하거나 괴롭지 아니하여 좋다’는 뜻을 의미하더군요!


 마지막으로, 제가 한 말 중 ‘아모르 파티(amor fati;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터이지만, 오늘은 이 말 대신 ‘아모르 호디에(amor hodie; 오늘을 사랑하라)’라고 끝 말씀을 드리며 이만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이상, 과거에 살았던 니체가 아닌 여러분들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또 다른 오늘에 여러분들을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모르 호디에(amor hodie), 비베 호디에(vive hodie)!
오늘을 사랑하고, 오늘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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