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이 익숙해질 때까지

남의 동네가 나의 동네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

by 대치동 비둘기

직업적으로 5년에 한 번 아예 새로운 장소로 일터를 옮기고, 1년에 한 번 일하는 공간을 바꾸다보니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어디든 일단 새로운 생활 공간이 되면 눈에 익숙해지고, 몸이 편안해지는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대치동에 와서 집을 보러 다니는 그 때는 마치 내가 대형 쇼핑몰 한가운데 내려진 것 마냥, 방향 감각 없이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부동산 사장님이 여기 저기 아무리 설명해주셔도 여기가 저기같고 저기가 여기같은 혼란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동네를 찍어 다시 집을 보러 왔을 때 즈음, 아는 분들이 아이를 키우기 좋다고 나를 몇 번 데려와주셔서인지 허둥지둥 대지않고 눈에 고스란히 집을 담았다.



동서남북 방향도, 일방통행 도로들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지고 주차장에 댈 수 있는 시간 정도를 가늠해 차를 빼는 에티켓도 장착했다. 다만, 십여년 만에 마주하는 복도식 아파트와 엔틱한 아파트 조경은 익숙해지지 않아 시간이 더 필요한 듯 했다.



요즘 정말 너무 안 움직였으니
아침 운동을 나가야지


백만년만에 새벽에 눈을 떠 집을 나선 길, 15분 거리의 수영장을 가는데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한 와중에 신호와 과속단속 장비가 있는 곳은 귀신같이 알고서 브레이크를 밟고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미소가 지어졌다.



제법 동네 사람같아진 것이, 쩔쩔매며 어깨가 아플 정도로 긴장해 다니던 골목과 도로가 이제는 익숙해져 스쳐지나간 것조차 기억에 나지 않는다니 시간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아이의 학원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 중 열에 하나는 낯이 익은 요즘, 역시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입학한지 20년만에 다시 모교를 찾아 내가 다니던 골목, 기숙사 앞 길, 도서관, 강의공간을 지나치면서 과거의 내가 내 앞에 스쳐지나가는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을 받았다.



4년을 지내던 그 공간이 떨어져 산 기간 때문인지 마치 '남의 동네'에 온 것만 같은 겸연쩍음과 불편함을 느꼈다. 추억 속의 그 장소는 단지 '추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가면 아무도 그렇게 바라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어야할 곳이 아니다'는 자격지심이 올라온다.



그래서인지 가던 카페, 음식점, 동네만 맴돌고 도전을 두려워하는 옹졸함이 샘솟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떼려고 매일 노력하고 주위를 살피는 건 아닐까.




변한 공간, 변한 사람들 속에서 나만 안 변하고 그대로지만 아마 나 역시 누군가에겐 변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요즘 잘 지내? 좀 달라보여.


생각해보면 서른이 지나고부터 매년 나의 삶에는 굵직한 인생의 변화들이 생겨왔고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익숙하게 그 변화에 익숙해져왔다.



최근 3년동안 아이를 키우며 다른 기관으로 옮기며, 집과 직장을 바꾸고, 올해도 환경적으로 업무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 새학기가 시작된지 3주쯤 지나서인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대치동이든 어디든 이사를 준비하고 갈 생각이 있는데 적응을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야너두 할 수 있다'고 응원하고 싶다. 다 사람사는 곳이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태연하게 그곳에 흡수될테니까.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리트머스종이처럼 주변을 흡수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말이지 2주만 지나면 그냥 동네 어린이가 되어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