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의 비극을 게임과 실험으로 다시 묻다
1장. 이 게임은 그냥 장난이 아니었다.
발명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게임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연구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휴대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임이나, 온라인 접속을 전제로 한 게임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많았고, 무엇보다 그런 게임들은 사람을 서로로부터 떼어놓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고개는 숙여지고, 눈은 화면에 고정되고, 웃음은 각자의 내부에서만 일어난다. 나는 반대로, 선택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그 선택이 공기처럼 퍼지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누가 망설이는지, 누가 급해지는지, 누가 웃는지—그 반응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닿는 게임 말이다.
내가 떠올린 형태는 전통적인 보드게임에 가까웠다. 다만 완전히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현대 기술을 쓰되, 기술이 전면에 나서지 않게 하고 싶었다. 버튼 몇 개와 작은 디스플레이 몇 개면 충분했다. 아두이노는 그 정도의 욕심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도구였다. 패키징은 솔직히 허술할 것이다. 하지만 중학생들끼리 노는 게임에서 허술함은 결함이라기보다 여지다. 모서리가 조금 삐뚤고, 선이 조금 드러나고, 반응이 때때로 늦는 그 틈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규칙을 해석하고, 서로의 반응을 과장하며, 더 크게 웃는다.
코딩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더라도, AI를 이용하면 설계와 구현 사이의 간격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다. GPT를 이용한 바이브 코딩은 그 믿음을 뒷받침해 줬다. 코드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정교한 시스템이 아니라, 선택이 반복될 때 드러나는 패턴이었다. 나는 이 게임이 전시용 결과물이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작은 사건이 되길 바랐다.
처음은 그렇게, 정말로 장난처럼 시작했다.
그런데 규칙을 고민하는 순간부터 게임은 조금씩 다른 표정을 띠기 시작했다. 나는 중학생이라는 집단을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중학생을 무지하고 순수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게임이 시작되면 그 말은 절반만 남는다. 게임이라는 환경 안에서 중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탐욕의 언어를 학습한다. “이기면 되는 거잖아.” “어차피 게임인데.” 이 말들은 책임과 윤리를 잠시 유예하는 암묵적인 합의가 된다. 그 합의가 서는 순간, 평소라면 망설일 선택이 망설임 없이 실행된다.
나는 그것을 타락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게임이란 도덕이 잠깐 쉬어가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일상에서 우리는 친절해야 하고, 적당히 양보해야 하고, 너무 티 나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게임은 그 규범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리고 그 정지 상태에서, 사람은 규칙만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인류학이 위기나 의례 같은 경계 상태에서 인간을 관찰하듯, 나는 게임이라는 작은 경계에서 선택을 보고 싶었다. 실험실이 아니라 교실의 공기 속에서, 그 선택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퍼지는지를.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유지의 비극’을 써먹을 수 있겠다.
공유지의 비극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다. 모두가 합리적으로 행동했을 뿐인데 결과는 파국이 된다. 흔히 그 결말은 인간의 탐욕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어졌다. 탐욕이 문제라면, 탐욕을 없애자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늘 늦다. 중요한 것은 탐욕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조건에서, 그 탐욕이 반드시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패배의 구조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최약자 기준 공멸 조건’을 넣기로 했다.
이 규칙은 간단하지만 불편하다. 누군가가 너무 앞서 나가면, 그 사람도 안전하지 않다. 게임이 끝났을 때 가장 약한 플레이어가 기준을 넘지 못하면, 모두가 함께 진다. 즉 1등은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이면서도 세계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 굳이 이런 규칙을 넣고 싶었을까. 공정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게임이 단순한 '연타 게임'으로 끝나서는 안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게임을 오래 이어갈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게임 속 세계를 오래 이어가야 한다는 목표는, 작은 세계를 오래 존속시키자는 목표와 다르지 않았다.
게임의 골격은 최대한 단순하게 잡았다. 플레이어는 3명. 버튼을 한 번 누를 때마다 자원 1개를 채굴한다. 서로가 얼마나 캐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각자의 선택은 각자의 내부에 가려져 있다. 대신 관전자는 남아 있는 공유 자원의 양을 볼 수 있다. 전체는 보이지만, 개인은 보이지 않는 상태. 경제나 정치에서 자주 나타나는, 익숙한 비대칭이다.
공유 자원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쌓인다. 1초에 하나씩. 이미 10개가 축적된 상태에서 시작한다. 게임 시간은 길지 않게 정했다. 30초. 나는 이 시간을 ‘게임의 제한시간’이라기보다, 세계의 수명처럼 두고 싶었다. 시간이 끝나기 전에 자원이 먼저 바닥나면 게임은 즉시 종료된다. 시간보다 자원이 먼저 끝나는 세계다.
그리고 핵심 규칙이 마지막에 걸린다. 종료 시점에서 최약자가 기준을 넘지 못하면 모두 패배. 이 규칙 하나로, 플레이어는 단순히 ‘많이 캐기’만을 목표로 삼을 수 없게 된다. 누군가의 폭주가 곧 모두의 패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심을 누르기만 해서야 재미가 없다. 그래서 가장 많은 자원을 캐고, 누적 기록으로도 가장 많은 자원을 확보한 사람이 승자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최약자 기준’과 ‘최다 채굴’이 동시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즉 플레이어는 달려야 하지만 너무 달릴 수 없고, 기다려야 하지만 너무 기다릴 수 없다. 남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고, 남의 행동은 내 승패를 바꾼다.
그 순간 나는 확신에 가까운 감각을 얻었다. 이 게임은 탐욕을 비난하려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탐욕이 자연스럽게 솟는 조건에서, 탐욕이 곧장 비극으로 수렴하지 않도록 만드는 구조적 질문이다. 다시 말해, 이 게임은 “왜 우리는 탐욕적인가”를 묻기보다 “어떤 규칙 아래에서 탐욕은 공멸이 되는가, 그리고 어떤 규칙 아래에서는 그렇지 않은가”를 묻고 있었다.
처음엔 발명대회용 게임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게임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세계를 설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30초 동안만 열리지만, 그 30초는 이상하게도 오래 남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