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한국해운협회와 한국무역업협회 관계자들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가 확정되면 국내 해운사들은 글로벌 해운사들과의 경쟁에서 사실상 손발이 묶이게 됩니다.” 이들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이는 단순히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 경제의 생명줄인 수출입 물류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의 표출이었다.
15년 논쟁의 발단
공정거래위원회는 국내외 해운선사들이 2003년부터 약 15년간 한국~동남아 항로 등에서 운임을 합의하는 공동행위를 한 것에 대해 공정거래법을 적용해 제재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선사들은 즉각 불복하며 소송에 나섰고, 이 사건은 한국 경쟁법 역사상 가장 복잡한 법리 논쟁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심에서 서울고법은 해운법을 근거로 명확한 판단을 내렸다. 해운사의 공동행위는 자유경쟁의 예외로 인정되며, 이에 대한 규제 권한은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있지 공정위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은 이를 뒤집으며 해운사 운임 공동행위에 대해 공정위도 일정한 조건에서 제재할 수 있다고 판단해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주목할 점은 대법원조차 선사들이 부당하게 운임을 인상하여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 사안의 핵심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시장 현실과 동떨어진 ‘당연위법’ 판단
공정위의 접근 방식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운임 공동행위를 당연위법으로 단정하면서도 실질적 경쟁제한 여부는 제대로 입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법원이 반복적으로 강조해온 원칙, 즉 “시장 구조와 경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시장지배력 존재 여부를 검토한 후 경쟁제한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법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실제 시장 상황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욱 역설적이다. 공정위가 문제 삼은 2003년부터 2017년까지 기간은 해운업계가 만성적 공급 과잉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2016년 한진해운 파산 사태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당시 세계 7위 규모의 해운사가 단 며칠 만에 무너지면서 전 세계 물류대란이 발생했고, 국내 수출기업들은 대체 선사를 찾느라 발을 동동 굴렀다.
공동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선사들은 화주의 요구대로 운임을 인하할 수밖에 없었다. 공정위가 선사 임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문 기록에서도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모든 임원들이 한결같이 “화주의 요구대로 운임이 결정됐다”고 증언했다. 합의는 있었지만 그것이 시장을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절차 위반의 실체
공정위가 절차 위반으로 지적한 122건의 공동행위 미신고 건에 대해서도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해수부에 신고된 운임 공동행위를 실행하기 위한 신고 금액 이하의 부수적 조정이었다. 조사 대상 기간 동안 선사들은 총 19회에 걸쳐 운임을 해수부에 정식으로 신고했고, 해수부는 이를 모두 수리했다.
미국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해상운송 감독기관인 FMC(Federal Maritime Commission)는 신고된 공동행위를 달성하기 위한 추가적 행위에 대해서는 독점금지법 적용을 명시적으로 면제하고 있다. 이는 해운산업의 특수성을 인정한 합리적 규제 방식이다. 한국 해수부도 과거 해당 122차례의 부속 협의가 별도 신고 대상이 아니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글로벌 경쟁의 비대칭성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일본, 중국, 대만 등 경쟁국들은 모두 자국 무역운송 증진을 위해 해운사의 공동행위를 사실상 용인하고 있다. 경쟁법 위반으로 제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유독 한국만 자국 선사들을 엄격히 제재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외국 선사들에게 유리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셈이 된다.
숫자로 보면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세계 1, 2위 선사인 MSC와 Maersk의 수송능력은 각각 660만, 460만 TEU에 달한다. 반면 한국의 10여 개 근해선사의 수송능력을 모두 합쳐도 50만 TEU에 불과하다. 이는 1위 선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선사들의 공동행위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만약 공동행위마저 금지된다면 저가 출혈 운임 경쟁으로 국내 선사들이 시장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더 나쁜 독점 시장의 형성이다. 한국 수출입 화주들은 현재의 경쟁적 시장 대신, 소수 초대형 외국 선사들이 지배하는 독과점 시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경제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
해운 및 무역업계는 한목소리로 공정위 제재 조치가 한국 경제 전체에 미칠 파급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이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은 수출 의존도가 GDP의 40%에 육박하는 전형적인 무역국가다. 그 무역의 99.7%가 해상운송으로 이루어진다. 해운산업의 붕괴는 곧 수출입 물류비용 상승과 운송 안정성 저하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한국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두 가지 핵심 쟁점이 명확히 규명되어야 한다. 첫째, 정기선사들이 실제로 부당하게 운임을 인상해 경쟁을 제한한 사실이 있는가. 실제로는 선사들이 화주에게는 을인 상황에서 운임을 인상할 수 없는 시장이었다. 둘째, 공정위가 미신고로 규정한 122건의 운임 조정이 정말로 해수부 신고 범위를 벗어난 것인가. 해수부의 유권해석과 미국 FMC 사례를 고려하면, 이 또한 신고를 달성하기 위한 부수적 행위인 것이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
법원은 이 사안이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 만큼, 법리적으로 해운법상 정당한 공동행위였는지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면밀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경쟁법의 엄격한 적용도 중요하지만, 산업 특수성과 글로벌 경쟁 환경, 그리고 국가 경제 전체에 미칠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히 해운사들의 법 위반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을 넘어, 한국이 어떤 규제 철학으로 자국 산업을 육성하고 보호할 것인가라는 더 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법의 형식적 적용과 경제적 실질 사이에서, 한국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