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가을, 부산 영도구에 사는 30대 청년 김 모 씨는 구직 사이트를 뒤지다 한숨을 내쉬었다. “부산이 세계 5위 항만이라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의 질문은 개인의 불만이 아니라, 부산 해양수도 정책이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를 드러낸다.
부산은 그동안 해양수도 정책으로 여러 가시적 성과를 보였다. 북항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며 2030년 완공을 목표로 오페라하우스와 해양문화공간이 조성되고 있고, 국립해양박물관은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동삼동 해양클러스터 혁신도시에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국립수산과학원 등 연구기관이 집적되었으며, 세계수산대학(World Fisheries University) 유치가 확정되었다. 2022년 제2차 유엔 해양과학 10년 회의, 2024년 세계해양포럼(World Ocean Summit) 등 대규모 국제회의도 연이어 개최되었다.
해양금융 인프라도 강화되었다. 해양금융종합센터, 캠코자산운용, 한국선박금융 같은 선박투자회사(SPC)가 부산국제금융센터(BIFC)에 입주했고, 2023년 한국해양진흥공사(Korea Ocean Business Corporation)가 발족해 부산의 해양금융 허브 기반이 한층 견고해졌다. 2024년 말 기준, 부산 소재 해양금융 관련 기관의 운용 자산은 17조 원을 넘어섰다.
시민은 체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화려한 성과 뒤편에는 냉정한 현실이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이 2024년 실시한 ‘해양수산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부산 시민의 해양수산에 대한 관심도는 100점 만점에 58.3점으로, 전 국민 평균 61.7점을 오히려 밑돌았다. 해양수도를 자처하는 도시 시민들의 관심이 전국 평균보다 낮다는 것은 역설이다.
설문에서 부산 시민들에게 어떤 해양수산 정책이 필요한지를 함께 조사했다. 응답자의 46.2%가 ‘항만·물류 관련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38.7%가 ‘항만이 지역경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정책’을, 29.4%가 ‘쾌적한 해양환경 조성’을 꼽았다. ‘글로벌 해양금융 허브 구축’(12.3%)이나 ‘국제회의 유치’(8.1%)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즉, 세계적인 항만, 해양금융 허브, 해양 클러스터 구축도 좋지만, 부산 시민들은 해양수도라는 정책으로부터 실제적인 일자리나 소득 증대, 그리고 생활 향상을 체감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일자리가 필요한데, 세금을 거두어 어디에 쓰나요?’라는 시민들의 냉소적 인식은 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신호다.
이제 부산시의 해양수도 정책은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항만과 항만 배후부지, 해운·물류, 수산, 조선·조선기자재, 해양관광 등에서 실질적 일자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고 관련 규제 철폐를 관철시켜, 해양수산이 시민 생활 개선에 체감되도록 하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환적 허브의 역설: 지나가는 화물, 남지 않는 일자리
부산은 대한민국 제1의 항만도시이며, 부산항은 2024년 기준 연간 물동량 2,380만 TEU를 처리하며 세계 5위 컨테이너 항만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물동량이 부산 시민의 일자리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부산항은 연간 1,100만 TEU 이상의 환적 물동량(2024년 기준)을 취급한다. 전체 물동량의 46%에 달하는 규모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산항에 일시 하역된 후 재선적되어 중국, 일본, 동남아로 운송되며, 환적 물동량을 대상으로 한 가공, 조립, 검사, 포장 등 부가가치활동(Value-added activities)은 미미한 실정이다.
예를 들어, 베트남에서 생산된 전자부품이 부산항을 거쳐 미국으로 수출될 때, 부산에서는 단순히 컨테이너를 옮겨 싣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만약 이 과정에서 품질검사, 재포장, 라벨링,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등을 부산에서 수행한다면, 검사원, 포장 기술자, 물류 전문가 등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하지만 현재는 그냥 지나간다.
KMI의 연구에 따르면, 부산항 환적 화물 중 부가가치활동이 필요한 원자재, 중간재 성격의 제품이 금액 기준으로 약 93억 달러(약 12조 원)에 이르며, 이들을 부산항 배후지에서 부가가치활동을 할 경우 약 1만 2,000명의 직접 일자리와 간접 일자리 8,000명을 합쳐 총 2만 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자리 창출, 부산시가 나서야 한다
연구 결과를 현실로 만들려면 부산시는 해양수산부와 항만정책 공조를 끌어내야 한다. 해수부의 ‘고부가가치 항만정책’을 부산 시민의 일자리 창출 정책으로 연계시켜야 한다. 환적 화물을 부산항으로 유치하는 일은 항만당국과 부산항만공사(BPA)가 할 일이지만, 그 화물에 대해 부가가치활동을 수행하도록 하는 정책은 부산시가 주도해야 한다. 일자리는 부산 시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산항만공사에 항만 배후단지에서 수행할 부가가치활동 화물을 유치할 경우, 터미널 운영사나 선사에게 터미널 임대료나 시설 이용료를 감면하는 인센티브 제공을 요청해야 한다. 싱가포르와 로테르담은 이미 이런 제도를 시행 중이다. 싱가포르는 환적 화물을 배후단지로 가져와 부가가치활동을 하면 항만 사용료를 50%까지 깎아준다.
둘째, 부산시는 항만 배후단지에 주요 화물별 부가가치활동 업체 및 연구소를 유치하기 위해 임대료 감면, 세제 혜택, R&D 지원 등의 인센티브 패키지를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와 전자부품 정밀검사 센터, 의료기기 품질인증 연구소, 고가 소비재 디자인 포장 시설 등을 유치할 수 있다.
2024년 부산항 환적 화물 중 전기전자제품은 21조 원, 기계류는 14조 원 규모다. 이 중 5%만 부가가치활동 대상이 되어도 1조 7,500억 원 규모이며, 이는 수천 개의 일자리를 의미한다. 독일 함부르크항은 배후단지에 자동차 부품 커스터마이징 센터를 유치해 연간 3,0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광역 자유무역지대, 규제 철폐가 관건
이와 함께 부산시는 부산항 배후지역을 광역 자유무역지대로 확대 지정하는 것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기존 항만구역 내 지역과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 이외에도 녹산 국가산업단지, 일반 산업단지, 김해국제공항 배후단지까지 포함한 광역 자유무역지대를 조성하여, 가공, 조립, 검사, 포장, 전시, 유통, 판매 등의 서비스를 여러 지역에서 통합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현재 부산의 자유무역지역은 신항 배후단지 일부(330만㎡)에 불과하다. 반면 두바이 제벨알리 자유무역지대는 5,700만㎡로 부산의 17배 규모다. 광역 자유무역지대가 조성되면 화물이 항만에서 배후단지, 산업단지, 공항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관세 유예 혜택을 받고, 기업들은 수입-가공-재수출 과정에서 행정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세특례제한법」, 「관세법」, 「자유무역지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 등의 규제 완화가 필수다. 부산시는 기획재정부, 관세청과 긴밀히 협의하고, 필요하다면 「부산 광역 자유무역지대 특별법」 제정을 추진해야 한다.
예산 확대 없이는 정책도 없다
부산시는 시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항만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현재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시의 항만 예산도 대폭 확대해야 한다. 2024년 부산시 예산 14조 8,000억 원 중 항만 및 해양 관련 예산은 약 1,200억 원으로 전체의 0.8%에 불과하다. 해양수도를 표방하는 도시치고는 턱없이 낮다.
이를 통해 해수부와의 항만정책 연계 추진, 광역 자유무역지대 설치와 관련 법령 개정 요구, 항만 배후지 부가가치활동 업체 유치, 관련 인력 양성(물류 관리사, 품질검사원, 통관사, 포장 디자이너 등) 프로그램 등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수립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하고, 부산을 해양수도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유리한 환경을 이용해 부산시는 해양수도를 구호가 아니라 시민의 삶을 바꾸는 실질적 정책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부산항을 지나가는 화물 1,100만 TEU는 숫자가 아니라 일자리 2만 개의 잠재력이다. 그 잠재력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해양수도 정책이다. 이제 부산시는 시민에게 답해야 한다. 세계 5위 항만이 당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