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엽토의 시간

by 양창호

산을 오를 때는

끄떡없던 운동화 끈이

정상을 돌아 몇 걸음 내려오자

문득 스르르 풀린다.


나는 무릎을 꿇고

헐거워진 매듭을 다시 묶으며

비로소 안다.

정상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이음매라는 것을.


너럭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면

오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용히 다가온다.


햇살에 젖은 숲,

초록나무 밑동에 쌓인

촉촉한 부엽토의 향기.

수십 번 맡았던 냄새인데

오늘따라 처음처럼 깊다.


초록은

자기 하던 일을

더 어린 초록에게 넘기고

갈색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나는 후배 교수에게 강의안을 건넸다.

“제 방식대로 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잎은

부엽토의 영양을 먹고

반짝이며 싱싱해졌으나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근원을 알지 못했으리라.


갈색 흙으로 변하면서

비로소 깨달았으리라.

자신이 서 있던 자리의 깊이를.


첫 월급봉투를 내밀던 날,

“이게 다 네 거야.”

웃으며 도로 쥐여주시던

어머니의 손.


그때 나는 몰랐다.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명함 뒤편에

부모님의 손때가

겹겹이 스며 있다는 것을.


연구실 새벽 세 시,

말없이 청소하시던 아주머니의 미소.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모형을 다듬던 후배 연구원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교수님 덕분입니다.”

말해주던

이름조차 흐릿한 제자.


아득한 누군가의 축복이

내 삶을 떠받치고 있었다.


이제 산을 내려가자.

부엽토의 향기가

발끝을 따라온다.


썩어 흙이 되는 일이

슬픔만은 아니구나.

다음 봄

새초록이 돋아날 자리를

미리 비워 두는 일이구나.


반짝이는 초록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부엽토가

제 몸을 낮추어야 하는지

아직은 모를 것이다.


괜찮다.

나도 몰랐으니까.


이제야 알았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keyword
이전 16화삶을 다시 읽는 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