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개항 이후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바다는 거대한 군함의 굉음으로 흔들렸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이 에도만에 들어왔고, 1876년에는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 포성을 울렸다. 비슷한 충격, 그러나 전혀 다른 귀결. 같은 바다에서 시작된 두 나라의 근대는 서로 엇갈린 길을 걸었다.
일본은 1854년 가나가와 조약 체결 이후 혼란에 빠졌지만, 그 혼란을 체제 전환의 동력으로 바꾸었다. 사쓰마·조슈 번의 하급 무사들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신식 군대와 의무교육, 근대적 세법과 공장제 산업이 빠르게 자리 잡았다. 1872년 일본 최초의 철도(신바시–요코하마)가 개통되었고, 1890년에는 제국의회가 열렸다. 불평등 조약에 묶였던 일본은 1894년 영국과의 조약 개정에 성공하며 외교적 자율성을 회복했다. 위기를 ‘국가 개조’의 계기로 전환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팽창을 동반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자신감을 제국주의로 바꾸었고, 1910년 대한제국 병합으로 이어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탈아입구((脱亜入欧))’는 문명개화의 구호이면서 동시에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논리였다. 일본의 근대는 성취와 침략이라는 두 얼굴을 함께 지녔다.
조선의 개항은 성격이 달랐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항이 공식적으로 개항했으며, 2026년은 부산항 개항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군사적 위협 속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관세권과 영사재판권을 내주며 주권이 흔들렸다. 내부에서도 위정척사와 개화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운동은 개혁의 방향을 둘러싼 충돌이 있었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통해 군제·화폐·산업을 정비하려 했지만, 열강의 각축 속에서 자율적 개혁의 공간은 좁았다. 결국 1905년 외교권 박탈, 1910년 병합으로 이어졌다.
식민지 시기 철도와 항만, 학교가 들어섰지만 그것은 자주적 산업화를 위한 토대라기보다 수탈의 인프라였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섰다. 1960~80년대의 산업화, 1987년 민주화, 그리고 오늘날 반도체·조선·K-컬처의 성장까지, 한국은 ‘강요된 근대’의 기억 위에서 새로운 근대를 재구성했다. 개항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극복의 에너지로 전환해 온 셈이다.
2004년 일본의 개항 150주년은 요코하마와 시모다에서 근대화의 출발을 기념하는 행사로 치러졌다. 동시에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성찰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우리의 개항 150주년 행사는 부산 시민단체가 추축이 되어 개항 150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국립외교원은 학술회의로 강화도조약 150주년 기념을 다루었다. 그것은 국권 상실의 서막을 돌아보는 자리이자, 식민과 분단을 넘어선 자강의 역사에 대한 재확인의 장이었다.
두 나라의 개항은 ‘선택과 강요’라는 차이를 안고 있다. 일본은 외압 속에서도 체제 개편의 주도권을 잡았고, 조선은 이미 팽창한 일본과 열강 사이에서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단선적이지 않다. 일본 역시 불평등 조약의 굴욕을 겪었고, 조선에도 자주 개혁의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 차이는 국제 질서의 구조, 정치 체제의 유연성, 그리고 개혁 세력의 결집도에서 비롯되었다.
150년 전의 개항은 단순한 항만 개방이 아니라 국가의 진로를 가르는 분기점이었다. 오늘 두 나라가 마주한 과제는 과거를 자랑이나 피해의 서사로만 소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일본에게는 근대화의 성취와 함께 침략의 책임을 직시하는 용기가, 한국에게는 상처의 기억을 넘어 이를 미래발전의 반면교사로 삼는 용기가 요구된다.
같은 바다에서 시작된 두 개의 근대. 그 물결은 서로 다른 항로를 그렸지만, 이제 다시 만날 지점에 와 있다. 개항 150주년은 과거를 반복하기 위한 기념이 아니라, 과거를 넘어설 준비를 묻는 질문이다. 역사의 기억이 대립이 아니라 성찰의 자원이 될 때, 19세기 바다에서 출발한 두 나라의 이야기는 새로운 장으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