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나아가는 사람들

seafarer의 어원

by 글곧

인류는 오래전부터 바다를 건너왔다. 뗏목 하나에 몸을 싣고 수평선 너머를 향해 나아간 무명의 항해자들로부터, 오늘날 수만 톤급 컨테이너선의 브리지에서 항로를 계산하는 현대의 선원에 이르기까지, 바다와 인간의 관계는 단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무엇이라 불러왔는가. 그 호칭 속에는 단순한 직업적 명칭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다.


영어로 선원을 뜻하는 seafarer는 sea와 fare라는 두 단어의 결합이다. sea는 바다, 그리고 fare는 고대 영어 faran에서 비롯된 동사로 ‘여행하다’, ‘출발하다’, ‘길을 나아가다’, ‘이동하다’, 나아가 ‘존재하다’는 의미를 두루 품고 있다.

따라서 seafarer를 문자 그대로 풀면 ‘바다로 나아가는 사람’, 혹은 ‘바다에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이는 결코 사소한 뉘앙스의 차이가 아니다. 선원을 단순히 배를 조종하고 뱃일을 수행하는 기능적 존재로 보는 시각과, 바다를 향한 동경을 품고 스스로 물길 위에 자신의 존재를 내던지는 주도적 인간으로 보는 시각 — 그 둘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넓다. seafarer라는 단어는 후자에 가깝다. 바다로 나아가는 것은 직업이기 이전에 하나의 선택이고, 하나의 실존적 태도다.


고대 영어 시 《The Seafarer》는 혹독한 북해의 겨울을 견디는 항해자의 내면을 노래한다. 얼음 바람에 살이 찢기고, 고독이 뼛속까지 스며들어도 그는 다시 바다를 향한다. “내 마음은 바다와 함께 떠 돈다”는 고백은, 바다가 단순한 노동 현장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임을 말해준다. 육지의 안온함을 알면서도, 다시 수평선을 바라보는 선택. 그것이 실존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는 seafarer의 정체성이다.


각 언어가 선원을 부르는 방식은 그 문화가 바다를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일본어에서 선원은 흔히 선원(船員, せんいん)이라 불리지만, 전통적으로는 해원(海員, かいいん)이라는 표현도 널리 쓰여왔다. 일본 최대의 선원 노동조합 역시 ’전일본해원조합(全日本海員組合)’이다. 海員, 즉 ‘바다의 구성원’이라는 표현은 선원을 바다라는 세계에 속한 존재로 규정한다. 바다 자체에 귀속된 인간. 이 표현에는 바다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경외감과 친밀감이 담겨 있다.

라틴어 mare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marin, 스페인어 marinero, 이탈리아어 marinaio 역시 ‘바다에 속한 사람’을 뜻한다. 이들에게 선원은 ‘바다로부터 온 사람’, 혹은 ‘바다에 속한 사람’이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누비며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원들 — marinero들이 없었다면 콜럼버스의 항해도, 마젤란의 세계 일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다라는 거대한 무대의 주체였다.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에서도 ’바다의 사람(sjømann, sea man)’이 선원을 뜻한다. 바이킹의 후예답게 이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 그 자체였고, 선원은 특별한 직업인이라기보다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었다. 북유럽의 해양 전통에서 바다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유와 모험의 공간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바다는 결코 주변이 아니었다. 통일신라의 해상 네트워크를 장악했던 장보고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했고, 임진왜란의 격랑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끈 수군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었다. 남해와 서해를 누비던 수많은 상인과 어민들은 바다를 두려워하면서도 이용했고, 이용하면서도 경외했다. 우리 역사에서 바다를 지배해 온 이들을 무어라 부르든 역동성이 담겨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냉정하다. 오늘날에도 선원들은 수개월씩 가족과 떨어져 항해하고, 태풍과 해적, 전쟁, 기계 결함과 고독을 감내한다. 세계 교역량의 약 90퍼센트가 해상으로 움직이지만, 정작 그 물류를 가능하게 하는 선원들의 삶은 대중의 시야 밖에 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각국의 입항 제한으로 수십만 명의 선원이 배 위에 발이 묶인 채 수개월을 보내야 했다. 그들은 세계 공급망의 보이지 않는 심장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잊힌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다. faran — 나아가다, 존재하다. 선원은 수동적으로 배에 올라탄 사람이 아니다. 바다의 부름을 듣고, 스스로 닻을 올리고, 수평선을 향해 뱃머리를 돌려 바다로 나아간 사람이다.

언어는 기억한다. 수천 년 전 고대 영어를 쓰던 누군가가 seafarer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로 나가는 일이 단순한 생업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을. 그 오래된 통찰은 오늘도 유효하다.


우리말 선원(船員)’이라는 단어가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배(船)를 중심에 놓고 인간을 그 구성원(員)으로 규정한다. 수동적이고 도구적이다. seafarer가 갖고 있는 의미와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바다를 지배해 온 이들의 역동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선원을 교육할 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선원은 ‘배에 속한 사람’. 이 아니고 배를 이용해 바다로 나아가는 긍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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