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시내로 들어서는 버스 창문에는 성에가 얇게 피어올랐고,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아낸 동그란 창 너머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흔들렸다. 스물한 살의 나는 서울에서의 첫 자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학기 동안 쌓인 피로가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지만, 고향 땅을 밟는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머니가 끓여두셨을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를 떠올리며 골목을 걸어가던 그 저녁, 공기는 얼음처럼 맑았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눈이 내렸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동네 교회로 향했다. 오래된 벽돌 건물, 낮은 종탑, 겨울이면 유난히 따뜻해 보이던 작은 예배당. 성탄 예배라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찬송가 소리가 천장에 닿았다가 다시 내려앉고, 양초 불빛이 벽을 노르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앞줄에서 고개를 숙인 채 찬송가를 부르던 한 여자를 보고, 나는 숨을 멈추었다.
숙영이었다.
처음에는 몰라봤다. 중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흙 묻은 손으로 머리를 넘기던 그 아이가 저렇게 단정하고 고요한 얼굴로 서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옆에 선 그녀의 오빠 창수 형의 얼굴을 보고서야 확신이 들었다. 검은 코트 위에 흰 목도리를 두른 그녀는 촛불 사이에서 유난히 밝아 보였다.
나는 찬송가 책을 들고도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한 채, 그녀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그 숨결이 나를 향해 오는 것만 같았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눈발이 다시 흩날렸다. 창수 형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몇 마디 안부가 오갔다. 그때 숙영이 나를 바라보았다.
“서울 갔다 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낮고 부드러웠다.
나는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수백 가지였는데, 입 안에서 모두 녹아버렸다. 눈이 그녀의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도 길고 적막했다.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 소리만 또렷했다.
여름이 되었다.
온양에 내려온 지 며칠째 되던 날, 나는 이유 없이 뒷산에 올랐다.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풀밭이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풀을 하나씩 뜯어 엮기 시작했다.
숙. 영.
풀로 이어 붙인 두 글자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비가 오면 지워지고, 누군가 스쳐 지나가면 흐트러질 이름. 누구도 모를 이름. 그런데도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마치 처음으로 그녀를 제대로 불러본 것처럼.
며칠 뒤, 창수 형 집 앞에서 숙영이를 다시 마주쳤다. 여름 햇살 속에서 그녀는 더 커 있었고, 웃을 때 눈이 가늘게 접혔다. 나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돌아오며 산을 올려다보았다. 풀밭의 이름은 이미 바람에 흩어졌을 것이다.
그 후로 시간은 쉼 없이 흘렀다.
대학 생활, 술잔, 새 친구들, 도시의 불빛. 온양은 점점 먼 지명이 되어갔다. 그래도 명절이면 내려와 창수 형과 막걸리를 마셨다.
어느 가을 저녁, 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숙영이 시집갔다.”
나는 잔을 든 채로 멈췄다.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집으로 걸어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유난히 많았다. 그 많은 별들 사이에서, 내가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말들이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몇 해 뒤, 그녀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 딸린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한 것도 모자라 이혼까지 했다니.
나는 늦은 용기를 내어 형에게 말했다.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짧은 침묵 끝에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안 돼.”
이유는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두드린다고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는 것을, 지레 알고 있었던 척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래전 그 풀밭이 떠올랐다. 손끝에 스치던 여름 풀의 감촉, 바람, 마을의 지붕들. 그때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여보!”
아내의 목소리가 집 안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나는 생각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 국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따뜻하고 익숙한 저녁의 냄새. 나는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창밖은 어둑했다. 온양의 눈 내리던 교회도, 여름 산의 풀밭도, 이제는 기억 속의 풍경일 뿐이다. 그 이름은 오래전에 바람이 가져갔다.
그런데도 문득, 아주 가끔은 생각한다.
그 많은 순간들 사이에서, 나는 왜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대답한다.
어쩌면 인연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때 아직 인연이 될 만큼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첫사랑이 다시 온다면 마음이 흔들리겠지만, 현재는 지금의 사랑을 간직할련다. 창밖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