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래된 교실 앞에서
돌 속에서 헤엄치는 고래들
태화강 상류, 반구천이 굽이치는 곳에 절벽 하나가 있다. 너비 약 8미터, 높이 약 4.5미터. 그리 크지 않은 이 바위 면에는 수천 년 전 누군가의 손길이 남긴 흔적들이 빼곡하다. 50마리가 넘는 고래들이 그곳에 살아 숨 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돌 속에서 영원히 헤엄치고 있다.
가슴지느러미가 유난히 긴 혹등고래, 새끼를 등에 업은 채 유영하는 귀신고래, 두 갈래로 물을 뿜어 올리는 북방긴수염고래, 향고래까지. 놀라운 것은 그 세밀함이다. 수면 위를 뛰어오르는 고래의 역동성, 물을 뿜는 순간의 생생함, 새끼와 나란히 헤엄치는 모성까지. 이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관찰의 기록이었고, 생존의 교과서였으며, 세대를 잇는 지혜의 전승이었다.
1971년 동국대 문명대 교수팀 눈에 처음 발견된 이 암각화는 이후 정밀 조사를 거쳐 학계에 보고되었다. 고래뿐 아니라 호랑이, 멧돼지, 사슴, 거북 등 육상 동물과 작살 맞은 고래, 포획 장면 등 총 300여 점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제작 시기는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 초기, 대략 기원전 7000년에서 3500년 사이로 추정된다.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이 암각화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며, 세계 고래 그림 암각화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목숨을 건 사냥, 그리고 귀환
상상해 보라. 신석기 혹은 청동기 시대의 어느 이른 아침을. 10명 남짓한 사내들이 큰 뗏목에 몸을 싣는다. 손에 쥔 것이라곤 사슴뼈로 만든 작살과 질긴 나무껍질로 엮은 그물뿐이다. 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그 뗏목 위에서, 그들은 수십 톤이 넘는 거대한 생명체와 맞서야 했다.
맨 앞에 선 이는 가장 경험이 많은 사냥꾼이었을 것이다. 고래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작살을 움켜쥐고 바다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급소를 정확히 찌르지 못하면 고래는 미친 듯이 날뛰고, 뗏목은 한순간에 뒤집히고, 차가운 바닷물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성공한다 해도 고래 한 마리를 육지로 끌어오기까지는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은 먼 상상만이 아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의 라말레라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대나무 뗏목과 손으로 만든 작살로 고래를 잡는다. 엔진도, GPS도, 현대 장비도 없이. 그들의 모습은 수천 년 전 반구대 사람들이 울산 앞바다에서 펼쳤을 사냥의 살아있는 복사본이다. 노르웨이 북부 알타의 암각화 역시 비슷한 시기에 보트를 탄 사냥꾼들이 고래를 쫓는 장면을 담고 있어, 고래잡이가 단지 한반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양에 접한 선사 인류의 보편적 생존 전략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성공했을 때의 보상은 컸다. 한 마리의 고래는 마을 전체를 몇 달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고래기름은 등불이 되었고, 뼈는 도구가 되었으며, 가죽은 옷이 되었다. 북극 원주민인 이누이트 족이 수천 년간 그래왔듯이, 고래 한 마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였다. 고래잡이는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 그 자체였다.
암각화, 선사시대의 블랙박스
돌아온 사냥꾼들은 그날의 사냥을 잊지 않으려 했다. 경험 많은 어른은 조상들이 그림을 새겨두었던 그 바위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돌로, 혹은 더 단단한 무언가로 오늘 잡은 고래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이 종은 어떻게 헤엄치는지,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어떤 순간에 가장 위험한지.
어느 날 저녁, 젊은 사냥꾼들이 그 바위 앞에 둘러앉았을 것이다. 노련한 어른은 돌에 새겨진 고래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했을 것이다.
“이놈은 꼬리가 세다. 꼬리에 맞으면 뗏목이 단번에 뒤집힌다.”
“저 고래는 새끼와 함께 다닌다. 새끼를 건드리면 어미가 돌진한다.”
“이 고래는 물을 두 갈래로 뿜는다.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지.”
그것은 교실이었다. 생존 기술을 전수하는 학교였고,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였다.
흥미롭게도 현대 과학은 이 오래된 교실이 얼마나 정확한 교과서였는지를 역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반구대에 새겨진 고래 그림들은 귀신고래의 등 혹, 혹등고래의 배 주름, 향고래의 네모진 머리 등 종마다 다른 신체적 특징을 정확하게 구별해 묘사하고 있다. 현대 고래 생물학자들이 종 분류에 사용하는 바로 그 특징들이다. 동물행동학자들은 이 암각화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철저한 현장 관찰의 산물이라고 평가한다. 수면 포유류를 이 수준으로 구별해 기록한 선사 유적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블랙박스였다. 위험을 기록하고 지혜를 축적한 데이터베이스, 글자 없이도 지식을 전달한 가장 오래된 교재였던 것이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
고래잡이는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맞서고, 미지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거대한 생명체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작은 뗏목으로 망망대해에 나가 고래와 싸운다는 것. 그것은 해양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의지의 가장 치열한 표현이었다.
그래서일까. 울산은 예로부터 고래잡이의 고장으로 이름났고, 장생포 고래문화특구는 지금도 그 기억을 살아있는 관광과 문화로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바로 그 울산 앞바다에서는 매일같이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가 초대형 선박을 탄생시켜 전 세계 바다로 내보낸다. 현대중공업의 전신이 울산 미포만의 황무지에서 시작할 때, 설립자 정주영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영국 은행가를 설득했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역사를 담보로 미래를 빌려온 셈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수천 년 전, 뗏목을 타고 고래와 맞섰던 그 용기가, 바다를 낯선 공포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였던 그 감각이, 어떤 형태로든 지금도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래된 바위가 건네는 말
반구대의 바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수천 년 전 그날의 함성과 파도 소리, 고래의 숨소리를 기억하며. 때로는 댐물에 잠겨 침묵하면서도.
그 바위에 새겨진 것은 고래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내일 앞에서도 배를 띄운 용기, 그리고 바다를 정복하고자 하는 해양 DNA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