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의 역사적 사실 교실에서 가르쳐야

by 글곧

2025년 3월, 일본 문부과학성은 2026년에 사용할 고교 사회과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채택된 교과서들은 예외 없이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명기하고, 한국의 실효 지배를 “불법 점거”라고 규정했다. 이는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일본은 2008년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처음 명문화한 이후, 2014년과 2018년 개정을 거치며 초·중·고교 전 과정에 걸쳐 이 주장을 체계적으로 심어왔다. 매년 수백만 명의 일본 청소년들이 이 내용을 학습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 현장은 이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독도 교육은 꾸준히 강화되어 왔으나, 정작 독도 문제와 역사적 맥락을 함께 이해하는 데 긴요한 대마도의 역사는 교육과정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중대한 공백이다. 대마도가 왜 한국 역사 교육의 의제로 올라와야 하는지, 그 역사적 근거와 교육적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문헌이 증언하는 대마도의 역사적 귀속

대마도와 한반도의 관계는 문헌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추적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대마도 출신으로 신라 조정에서 사신으로 활약한 왜인 호공(弧公)이 등장한다. 대마도인이 신라의 관직 체계 안에 편입되어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고려사』에도 대마도가 고려의 행정적 관할 아래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사들이 산재한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조선 측 기록이다. 『세종실록』 세종 원년(1419년) 6월 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이 발언은 기해동정(己亥東征), 즉 조선이 왜구의 소굴이 된 대마도를 직접 정벌한 해에 나온 것이다. 조선이 대마도를 단순히 이웃 섬이 아니라 본래 자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국가 공식 문서가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대마도 내부에서 나온 기록이다. 대마도의 무사 도 사다후사(源定房)가 1723년에 편찬한 『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는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牧)이다. 옛날에는 신라인들이 살았다”(大麻島是高麗國牧 昔有新羅人居之)라고 명기되어 있다. 도 사다후사는 대마도 종씨 가문의 도주급 인물이다. 대마도의 역사를 대마도 도주, 영주급 인물이 스스로 기록한 문서에서 한반도와의 귀속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지도가 그어놓은 경계선

문헌과 더불어 고지도 역시 대마도의 역사적 귀속을 뒷받침한다. 1592년 일본에서 제작된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는 대마도를 경상도에 속하는 섬으로 표기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즉 조선 침략의 당사자인 일본이 만든 지도조차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그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시사적이다. 1830년 일본에서 제작된 『조선국도(朝鮮國圖)』에서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지도 자료들의 의미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방식과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의 근거로 제시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는 1696년 도쿠가와 막부의 도해(渡海) 금지령과 1779년경의 일부 지도들이다. 반면 대마도가 한반도에 귀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까지 소급된다. 역사적 선점의 논리에서도, 자료의 양과 질에서도, 대마도 관련 사료는 일본의 독도 주장에 비해 월등한 우위에 있다.


공도정책이라는 역사적 비극

그렇다면 한반도와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대마도에 왜 한민족이 정착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려 말·조선 초의 왜구 문제와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이해해야 한다.

14세기 후반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전례 없는 규모로 창궐했다. 왜구는 한반도 해안을 넘어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했고, 심지어 개경 인근까지 위협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은 백성들을 도서 지역에서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정책을 시행했다. 울릉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태종은 1403년 울릉도를 비우도록 명했고, 이후 조선 정부는 섬을 비운 채 주기적인 순찰로만 영유권을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공도정책의 역설적 결과가 대마도 문제에도 투영된다. 대마도 역시 조선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점차 일본의 실질적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섬을 비운다는 것은 그 섬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역사는 때로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는다.


1872년의 분기점: 메이지 유신과 대마도 편입

대마도의 역사적 지위가 현재의 형태로 굳어진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다. 근대국가 수립과 함께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화한 일본은 1872년 대마도를 이즈하라현(厳原県)으로 편입시키고 중앙집권적 행정체계 아래 두었다. 이 시기는 조선이 여전히 전통적 외교 질서 안에 머물러 있던 때였으며, 한반도에는 이 변화에 법적·외교적으로 대응할 근대 국제법적 역량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마도 편입은 사실 독도 문제와 동일한 역사적 구조를 갖는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방식과, 1872년 대마도를 이즈하라현에 편입시킨 방식은 제국주의적 행정 통합이라는 동일한 논리 위에 놓여 있다. 이 구조적 유사성을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것은 독도 문제를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닌 제국주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대마도 반환 선언과 그 역사적 의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8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우리 땅이므로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 선언은 즉흥적인 수사가 아니었다. 앞서 살펴본 역사 문헌들과 지도 자료들, 그리고 수백 년에 걸친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를 근거로 한 역사적 주장이었다.

대마도 반환 요구는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협상 과정에서도 제기되었으나, 냉전 질서와 미국의 대일 정책이라는 지정학적 현실 앞에서 좌절되었다. 이 사실은 영토 문제가 순수한 역사적 정의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국제 정치의 역학 속에서 다루어진다는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역사적 주장의 정당성이 국제 정치적 결과에 의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교실이라는 전선(戰線)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응하는 방식은 감정적 반발이나 단순한 반박을 넘어서야 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 학생들이 한 일 양국 역사의 복잡한 층위를 스스로 읽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다. 그 역량은 독도만을 가르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마도의 역사적 사실을 함께 가르칠 때, 학생들은 독도 문제를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한일 관계사의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초·중·고교 역사 교육과정에서 대마도의 역사적 귀속 문제를 독도 교육과 연계하여 가르치는 것을 제안한다. 『세종실록』과 『대주편년략』의 관련 기록, 조선팔도총도를 비롯한 고지도 자료들, 공도정책과 그 역사적 결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편입 과정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사료에 근거해 읽고 평가하는 능력, 그리고 국제 관계에서 역사적 정당성이 어떻게 작동하고 또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일본이 자국의 다음 세대에게 수십 년째 체계적으로 역사 인식을 심어 가고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교육은 미래를 향한 선택이다. 사료가 말하는 진실을 교실에서 가르치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조용하고 가장 확실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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