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준이 다리를 다친 건 국민학교 3학년, 오월의 일이었다.
운동장 귀퉁이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아이들이 무등 타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차례가 돌아오자 민준은 짝꿍 병태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병태가 비틀거렸다.
순간이었다.
민준의 왼발이 땅을 잘못짚었다. 민준의 몸위로 애들이 포개졌다.
뼈와 뼈 사이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지듯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소리보다 먼저 통증이 왔다.
민준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냥 주저앉았다.
서울 큰 병원까지 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버스가 비포장 길을 지나갈 때마다 차체가 흔들렸고, 그때마다 민준의 다리가 덜컹거렸다.
아버지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민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민준은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도 울지 않았다.
그날 이후 민준의 걸음에는 리듬이 생겼다.
왼발이 약간 늦게 땅을 짚는 엇박자.
민준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체육 시간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자신의 발소리를 듣는다.
탁.
탁—탁.
세상은 늘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데,
나는 다르다.
2
중학교 교실은 민준에게 낯선 나라 같았다.
짝꿍 재호는 축구를 잘했고,
반장 현수는 웃음소리가 컸다.
민준은 그들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았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면 민준은 얼른 지워버렸다.
생각이 완성되기 전에 지우는 습관이 생겼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다.
정아.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른 아이였다.
민준은 한 번도 말을 걸지 못했다.
말을 걸면
그 애가 자신의 걸음걸이를 보게 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논리였지만
민준에게는 명백했다.
하굣길은 십 리였다.
포장도 되지 않은 흙길을 매일 걸었다.
길 오른쪽으로는 강이 흘렀다.
여름이면 물이 불어
수면이 키보다 더 높아졌다.
민준은 가끔 강을 보며 생각했다.
저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떨까.
차갑고 조용하고
아무도 자신의 발소리를 듣지 않는 곳.
그 생각은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부드러웠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눈을 뜨면
다 전처럼 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
3
꿈속에서 민준은 다른 집에 있었다.
3층짜리 집.
계단이 대리석이었다.
마당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거실 한쪽에 작은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화면에서 색이 나왔다.
컬러였다.
얼마전 친구가 자랑하며 말했던 AFKN 채널 방송이다.
금발의 여자가 영어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민준은 한 발짝 다가갔다.
집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복을 입은 남자.
잘 차려입은 여자.
머리를 단정히 넘긴 노인.
그들은 민준을 힐끗 보았다.
이쪽을 본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시한 것도 아닌 시선.
그리고 다시 자기 일을 했다.
민준은 소파 끝에 앉았다.
집은 크고 조용하고 약간 어두웠다.
이제부터 여기를 내 집이라고 우겨야 하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눈이 떠졌다.
4
그러나 꿈이 한 겹 더 있었다.
눈을 뜨니 단칸방이었다.
벽지에는 작은 꽃무늬가 있었다.
동생 둘이 옆에서 눈을 비볐다.
막내가 칭얼거렸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냄비를 달그락거렸다.
된장 끓는 냄새가 방으로 흘러들어왔다.
민준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 생은 꿈이 아니구나.
그런데도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다.
동생이 이불을 잡아당겼다.
“오빠, 나 이불.”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불렀다.
5
영희를 처음 만난 건 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너 민준이지?”
돌아보니
얼굴은 빵처럼 동그랗고 볼이 약간 붉은 여자애가 서 있었다.
눈이 먼저 웃고 있었다.
“나 2반 영희야. 우리 옆집에 네 사촌 살잖아.”
민준은 잠시 굳었다.
“네 얘기 들었어”
영희가 말했다.
“착하대. 공부도 잘한다고.”
거짓말 같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영희는 가끔 말을 걸었다.
“야, 점심 뭐 먹었어.”
“국.”
“무슨 국.”
“콩나물.”
대답하기 쉬운 질문들이었다.
어느 날 영희가 말했다.
“문방구 아저씨가 아이스께끼 하나 더 준대.”
민준이 처음으로 되물었다.
“진짜? 언제부터?”
그게 시작이었다.
6
영희와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정확히는
걸음걸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영희는 한 번도 민준의 발을 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눈빛이 달랐다.
재지 않는 눈.
어느 하굣길이었다.
강 옆 길을 걸었다.
영희가 물가를 가리켰다.
“야, 개구리 있다.”
민준은 강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물이 반짝였다.
그냥 강이었다.
차갑고 조용한 곳이 아니라
개구리가 사는
따뜻한 강.
집에 돌아오는 길이
조금 짧아졌다.
7
그해 가을, 민준은 반장 선거에 나갔다.
담임 선생님이 “반장 후보 없어요?” 하고 물었을 때
민준은 손을 들었다.
교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민준은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바라보며,
손을 내리지 않았다.
결과는 2등이었다.
그동안 이렇게 신난 적이 없었다.
쉬는 시간에 영희에게 말했다.
“나 반장 될 뻔했어. 2등 했어.”
그 말이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영희가 누나처럼 웃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8
어느 날 저녁. 하굣길
해가 지고 있었다.
강물이 어둡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가에서 어떤 아이가 미끄러졌다.
흙이 무너져 발을 헛디뎠다.
몸이 강 쪽으로 기울었다.
“악! 나 좀! “
짧은 외침.
민준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엉킨 발로 달렸다.
강가에서 그 아이 팔을 잡았다.
둘이 함께 넘어졌다.
흙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둘 다 숨을 헐떡였다.
9
그날 밤.
민준은 또 꿈을 꾸었다.
대리석 계단이 있는 집.
수영장.
컬러텔레비전.
그 집 사람들이 또 민준을 힐끗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영희였다.
“야.”
영희가 말했다.
“여기서 뭐 해. 내려와.”
민준은 계단을 내려갔다.
탁.
탁.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에서는
걸음 박자가 아주 일정했다.
10
민준은 눈을 떴다.
다시 단칸방이었다.
오늘은 아쉬움이 길게 남는다.
동생들이 뒤척이고 있었다.
민준은 잠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누나같이 웃아주던 영희를 생각했다.
“이 생이 꿈이 아니어도 좋겠다.”
또 밤이면 꿈을 꾸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