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한가운데, 지도 위에서는 점처럼 보이는 섬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작은 점들 위에 한 시대의 비극이 응축되어 남아 있다. 마셜 제도의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는 바로 그런 장소다. 그것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흔적이다.
이 위령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에 왜 한국인들이 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1940년대,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군사기지로 전환했다. 활주로와 항만, 군수시설을 짓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공백은 식민지 조선인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바다를 건넌 이들이 아니었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고, 군인이 아니면서도 군대의 통제 아래 놓였으며, 인간이 아니라 ‘자원’으로 취급되었다.
마셜 제도 역시 그 거대한 전쟁 기계의 일부였다. 약 300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이곳에 동원되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활주로를 닦고, 군수 물자를 나르며, 생존과 노동의 경계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식량은 부족했고, 질병은 흔했으며, 탈출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들의 비극은 노동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의 흐름이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기 시작한 1944년 이후, 상황은 급격히 변한다. 패전을 예감한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험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사 기밀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 함께 데려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결국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어느 날 일본군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집합시켜 “이동한다”라고 말한 뒤 숲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일부는 도망쳤지만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했다. 바다로 떠밀려간 시신이 해안에 며칠씩 떠 있었다는 기록은,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잔혹한 장면이다.
이 비극은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태평양의 외딴섬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리고 그들이 식민지의 이름 없는 노동자였기에, 그들의 죽음은 오랫동안 기록되지 못했다. 가족들은 그들이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세월을 보냈다.
이러한 망각의 시간을 뚫고 세워진 것이 바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였다. 그러나 이 위령비의 운명 또한 아이러니하다. 일본은 자신의 잘못을 면책받기 위해 정확지도 않은 피해자 대표에게 보상하고 이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전후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서 다시 한번 버려진 존재가 된다. 마셜 제도는 일본 통치에서 미국 신탁통치로, 그리고 독립국으로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 유적과 기억의 장소들이 관리 주체를 잃었다. 위령비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 사람의 선택이 역사를 다시 붙잡는다.
마셜 제도 수도 마주로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한 교민, 정연재 씨는 방치된 추모비를 발견한다. 필자가 이분을 만났을 때 이분이 한 말이다. “이 위령비는 길가운데에 버려져 관리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비석을 자신의 사업장으로 옮겼다. 세차장 왼쪽에 공간을 만들어 죽은 이들의 이름 없는 기억을 모셔두었다. 누군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가장 인간적인 장소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위령비는 두 개의 역사를 동시에 품고 있다. 하나는 강제 동원과 학살이라는 폭력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기억을 끝내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의지의 역사다.
태평양의 바다는 지금도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침묵이 아니라, 아직 다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의 침묵이다. 어떻게 해보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이후 10여 년이 흘러버렸다. 여전히 세차장 한편에 놓여 있을 작은 비석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