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치

by 글곧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울 속에 놓인다. 가족의 기대, 학교의 성적표, 직장의 평가표, 그리고 사회의 시선이 그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이 곧 ‘나’라고 믿기 시작한다. 동료의 평가, 상사의 판단, 학생들의 강의평가, 대중의 인기 지표까지, 삶은 끝없이 측정되고 비교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의 삶은 이 평가의 흐름 속에서 방향을 바꾼다. 한 대기업의 중간관리자는 동료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뒤, 자신의 의견을 줄이고 조직의 분위기에 맞추는 선택을 한다. 대학의 한 교수는 강의평가 점수를 의식해 학문의 깊이보다 학생들의 만족도를 우선하기 시작한다. 연예인은 대중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정하고, 정치인은 여론조사의 숫자에 따라 신념을 유연하게 바꾼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은 때로는 나침반이 아니라 족쇄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시작된다. 과연 인간의 가치는 타인의 평가로 완성되는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 성찰의 권고가 아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조롱과 오해 속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살았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타인의 평가가 아닌 스스로 규정한 가치에 따른 것이었다. 외부의 판단이 아니라 내면의 기준이 삶을 결정한다는 선언이었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을 “목적 그 자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인간의 가치는 타인의 수단으로 쓰이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따르는 데 있다고 보았다. 만약 우리의 가치가 오직 타인의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목적을 위해 조정되는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문학에서도 이 질문은 반복된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죽음을 앞두고 깨닫는다. 그가 살아온 삶이 사실은 타인의 시선에 맞춰진 삶이었음을. 그의 절망은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쉽게 발견된다.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작은 책방을 연 사람, 대기업을 그만두고 바다로 나가 선원이 된 사람, 의대·한의대·약대에 모두 합격하고도 사범대를 선택한 고등학생, 혹은 남들이 보기에 비효율적이지만 자신이 의미 있다고 믿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평가의 기준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겼다는 점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타인의 평가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공동체는 일정한 기준과 규범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거리를 둘 것인가 하는 일이다. 타인의 평가는 참고일 수는 있지만,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한다는 것은, 모든 평가를 무시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렵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삶이다. “나는 왜 이 선택을 하는가”, “이 길이 나에게 의미 있는가”, “이 판단은 두려움 때문인가, 신념 때문인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곧 자기 가치의 시작이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평가 속을 지나간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는 질문은 단 하나일지 모른다. 나는 남들이 기대한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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