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 를 읽고

독후감은 처음이라

by 유니버썰

tempImageisgH2U.heic


보통 8시 20분에 회사 건물에 도착 한다 건물에 진입 후 주차장을 빙글빙글 돌고돌아 지하 2층 까지 내려가면 항상 대는 위치에 차를 세운다 시동을 끄고 조용해진 차 안에서 앞으로 30분은 뭔 지랄을 해도 내 시간이다 이제부턴 조금 눈을 붙일 것인가 책을 볼 것인가에 대한 팽팽한 몸과 머리의 기싸움이 시작 된다 나는 항상 지고 항상 이긴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이 전쟁 또한 명분이 중요하다 전날 과음을 했는가? 잠을 잘 못잤는가? 출근하며 졸음이 찾아왔는가? 재미있는 책을 찾았는가? 정신은 멀쩡 한가? 에 대한 전체적인 컨티션 스캔을 시작하고 잠을 잘 명분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아쉬운 마음 한 스푼과 오늘 하루의 작은 용기를 책을 펼치는 곳에 갔다 쓴다 계획이 통과 되면 실행이다 이 소리없는 전쟁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고 끝이 난다 승리와 패배가 있고 난 그걸 지켜보고 있다 전술은 없다 기습도 비겁함도 없는 정면승부다 오직 투명함과 머릿수로 승리와 패배가 결정된다 어느것에도 마음 쓰지 않는다 어느 한 쪽으로 마음을 쓰는 순간 후회가 남는다 마음 보단 상황과 실리에 집중 한다 30초의 짧은 전쟁이 끝나고 결과를 확인한 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눈이 없는 손으로 어둠속에 벗어놓은 팬티를 찾듯 뒷좌석을 슥슥 문지르며 책을 찾는다


보통 사람들 보다 짧은 기억력에 아는 작가의 이름이 다섯 손가락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라서 책 표지의 이름은 처음 보는 사람 이였지만,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 이란 제목은 매일매일 노트에 무식하게 일기를 쓰는게 취미인 사람이, '호홓'하며 책을 들어 올리기엔 의식보다 손이 빨랐다 부드러운 굴곡이 있는 표지의 촉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스르륵 넘겨 보고, 비교적 얇고 작은 책의 뻣뻣함이 다가왔다 단순히 책 제목과 뻣뻣함이 맘에들어 겨드랑이에 끼고 계산대로 가 그 새 온기가 전달 된 따뜻해진 책을 점원에게 전달했다 점원은 친절했다


며칠동안 이상하게도 내 안에 술쟁이 귀신이 퇴근 시간만 되면 어이 왔는가? 이리 오게. 여기 앉게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에 맛있는 술과 안주로 우리의 새싹을 저기하고 저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는 사람을 데리고 오게!! 하며 주변에 아는 사람을 꼬드겨 매일 같이 술을 마셔 댔다 책을 사고 며칠간 읽지를 못하고 뒷좌석에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내 몸은 술에 절여져 맛이 갈 때쯤 술쟁이 귀신을 멀리했다 이틀동안의 속 앓음과 그래도 출근은 해야 했기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상태가 안 좋은 몸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어디서 차례를 먼저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참을성을 갖고 차례를 먼저 읽고 본 문으로 들어갔다


연속적이지는 않았지만 며칠간의 아침 시간을 보내고 가끔씩은 코로 흐응 하며 콧바람이 나오기 시작해 가슴에 뜨거운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얀 김이 머리 위로 올라오는 느낌을 몇 번 받았다 나는 이 현상을 ‘사도가 나타났다! 에반게리온 발진!’ 이라는 되도 않는 이름을 지었지만, 이 느낌은 사실 꽤 삶이 충만해 지고 영혼의 색깔이 풍부해 지는 경험이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 상실과 슬픔에 세상의 색이 변했던 1991년의 여름을 아직 기억한다


평촌역 앞 먹자골목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왔다 건물과 건물 좁은 골목길에서 약간의 쓰레기 냄새가 났다 패기가 느껴지는 젊은 츄리닝 친구들이 거는 눈싸움을 피하지 않고 담배를 피고 껐다 주차해놓은 곳을 잊어버려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좀 걷고 싶었다 마음은 에반게리온이 출동 했고, 책의 여운에 가슴이 무거웠다 세상이 젖을랑 말랑하는 눈앞에 이 동네는 무슨 안마방과 룸빵 밖에 없었다 당근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은 다 되어 가고, 내 오래된 차는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로 분주한 오후 4시 노을이 무서운 간판들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세상은 엉망진창이었고 나는 작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