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이라도 나이를 빨리 먹고 싶어 겨울방학과 연말연시를 애타게 기다리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 당시 아이들이 모여 놀던 공터는 요즘 볼 수 있는 현란한 놀이기구는 없었지만,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땅바닥과 아늑하게 그림자를 덮어주는 나무들만으로도 놀기에 완벽한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내리는 한낮부터 그림자가 슬그머니 길어져 나무를 타고 오르는 초저녁까지 누가 뭐라 하든 말든 모여서 놀았다.
커다란 오징어를 그려놓고 그 위를 깨금발로 뛰고, 달팽이 집 같은 회오리 모양의 선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땀이 옷을 적실 때 즈음엔 구석 바위 위에 앉아 그 나이에 흥미로울 갖가지 소문들을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 즈음 모두 어딘가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다가도 긴 시간 지나지 않아 누군가 뛰쳐나가 오른손 엄지를 치켜들고 외쳤다.
“땅따먹기 할 사람~ 여기 여기 모여라~ 땅따먹기 할 사람~ 여기 여기 모여라~!”
그러면 너 나 할 것 없이 오랜만에 소개팅 제안을 받은 노총각처럼 재빠르게 뛰어나가 게임을 제안한 친구의 오른손 엄지를 잡고는 자신의 엄지도 다음 사람을 위해 치켜드는 것이다.
신명 나는 놀이의 시작에 안성맞춤인 의식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이러한 의식은 엄지를 잡은 모든 사람이 놀이에 최선을 다해서 임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이기도 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즐겨야만 함께 느끼는 재미가 최고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함께하는 놀이를 지탱하는 근원적인 1원칙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성스러운 공터에 스산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함께 놀자고 엄지를 맞잡은 친구 중 한 명이 놀이 중에 자꾸 먼 하늘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우리의 놀이는 바람 없는 날의 돛단배처럼 표류하기 시작했다.
꿋꿋이 게임에 집중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를 따라서 함께 하늘을 보는 친구들도 생겼고,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아이도 생겼다.
가장 중요했던 점은 놀이의 목적이었던 모두의 재미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하루 이틀 지나며 공터를 찾아오던 아이들은 잃은 재미를 찾아 다른 공터로, 놀이터로, 운동장으로 흩어졌다.
아이들이 뛰어다녔던 땅바닥에는 오랜 시간 숨을 죽이며 기다리던 잡풀들이 다시 솟아 덮었다.
공터는 더 이상 공터일 수 없었다.
우리의 놀이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게 되었듯이.
공평한 시간은 천천히 흘러 천방지축 아이들은 나란히 사회인들이 되었다.
나는 본가에 들를 일이 있어 고향을 찾았다가, 오랜만에 동네를 산책했다.
기억이 이끄는 대로 걷다 아직 풀들이 무성한 그 시절의 공터까지 걷게 되었다.
더 크고 무성해진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는 기억보다 훨씬 작은 곳이었다.
그리고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먼저 그곳에 있었다.
회색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잡풀들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얼핏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공터에서 함께 놀던, 더 정확히 얘기하면 놀다가 하늘을 바라보던 그 친구였다.
여전히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나무 옆 바위에 앉아 인사와 근황을 나누고, 이런저런 추억을 얘기하다 결국 나는 긴 시간 가졌던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
- 너 어릴 때 놀다가 갑자기 하늘 보던 거 기억나?
- 응 기억나지.
친구는 손에 들고 있는 잡풀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무심히 얘기했다.
손쉬운 친구의 대답에 왜인지 더 조급해져 덧붙여 물었다.
- 그때 하늘에 뭐 있었어? 뭘 그렇게 본거야?
친구는 그 시절 뛰어다니던 아이들 사이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그때의 여전한 눈빛으로 노르스름한 서쪽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 그냥. 그때는 하늘 보는 게 좋았어.
바람이 불고, 풀들이 물결모양으로 스러지고, 멀리 풀벌레 소리가 퍼진다.
모두가 즐겁고 싶어서 엄지를 잡고 시작했던 놀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하늘.
그 둘 사이 풀이 무성한 공터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거겠지.
우리는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방향으로, 이내 곧 각자의 방향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