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의 낯설게 보기.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았다.
작품에선 이쁘고 잘생긴 데몬헌터스와 저승사자들이 아이돌로서 케이팝을 부르고 있었다.
내용은 사랑과 음모, 복수와 용서 그리고 희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내가 쓴 단어들을 보면 알겠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내겐 한 가지 요소가 색달랐다.
‘낯설게’ 본 한국이 그것이다.
아주머니들이 즐겨 입는 선캡으로 완성되는 화려한 색감의 등산복 패션.
김밥과 컵라면으로 대표할 수 있는 분식 세트.
전설의 고향 때나 나오던 저승사자와 무당 그리고 서낭당.
심리, 물리, 화학 요법을 종합하여 진료하는 한의원.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간판이 빼곡한 거리의 풍경까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익숙한’ 장면들이 케이팝과 아이돌이라는 요소와 결합하여
전 세계에 이른바 통하는 아이템들이 되었다.
케데헌이 이룬 흥행이 쉽게 태어나지 않듯,
감춰진 매력을 들춰내 볼 수 있게 만드는 ’낯설게‘ 보기는 말처럼 쉬운 과정이 아니다.
낯설게 보기 위해서는 한 발자국 뒤로 걸어 나와 자신이 속한 환경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천천히 살펴보아야 가능하다.
얼마 전에야 이러한 과정을 ’ 메타인지’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 내 생활과 메타인지를 결부하기는 특히 육아와 접목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먹이기, 입히기, 씻기기, 재우기, 놀아주기와 같은 일상이 겹겹 쌓이면
부양자는 현 상황에 잠식돼 감정의 경계선에서 작두를 탄다.
아파트에서 아이를 창 밖으로 던지고 싶었다.라는 충격적인 경험담부터,
나도 모르게 아이의 발바닥을 세게 때렸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라는 육아 선배들의 고백은 이 같은 일이 특정인에게만 일어나는 상황이 아님을 증명한다.
만약 우리 인류의 내로라하는 성인군자들에게도 육아를 맡겼다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무화과나무 혹은 보리수나무를 깎아 ’ 사랑의 매’를 굵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 레이먼드 카버의 ’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는
육아의 상황에서도 ‘낯설게’ 보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극단적 상황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일을 맞은 아이가 순간적으로 일어난 뺑소니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익숙했던 아이와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낯설게’ 본다.
아니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제발 이 아이가 눈을 뜨고 우리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도하고,
아이 외엔 세상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아이를 잃은 부모는 의외의 인물에게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 보살핌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다행히 아직 소설은 소설이어서,
우리의 아이들은 자꾸 안아달라고 떼를 쓰고,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요구와 행동을 반복하고,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아이들에게 바쳐야 하는 상황이 (다행히) 끝없이 이어진다.
만약 우리에게 잠시의 시간과 여유가 허락된다면,
현실에서 잠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아이와의 존재와 관계에 대해 제삼자 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아이들이 웃고 또 우는 얼굴을 가만히 묵상하는 것은
아빠, 엄마로서의 삶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꽤나 도움이 되는’ 과정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