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발표

by 이인삼각

분당에 있는 대형 백화점에서 신규 입찰 제안 발표가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 순서였을 것이고 심사위원들의 지친 표정과 그들 등 너머로 노랗게 떨어지던 석양이 기억난다. 순서를 기다리느라 지쳐버린 우리 회사 K 팀장은 그래도 다행히 무난하게 발표를 마쳤다. 이어지는 Q&A 시간에서 까다로운 질문들이 줄이어졌다. 유사한 사례들을 K 팀장이 적절하게 숫자들을 외워가며 잘 선방해냈다 생각했을 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심사위원장인 고객사 전무가 고개를 좌우로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묻는다. ‘더 질문들 없나요?’. 좌우로 끄덕끄덕 확인을 하자 벌떡 일어나 무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가는 것이었다. 무슨 실수라도 했는가 갸우뚱 하고 있을 때, 회의실 문 앞에서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마무리를 던진다. ‘이 회사랑 일하면 되겠네, 그렇게 결정합시다’. 최고의 제안 발표였다.


제안 발표가 있는 날은 제냐의 네이비블루 슈트를 입는다. 가는 파란색 스트라이프가 윤기 나게 흐르는 원단에, 허리에 착 달라붙는 핏이 좋은 슈트를 입으면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와 다름없다. 파란색 바탕에 더 짙은 파란 도트 무늬가 질서 있게 뿌려진 페라가모 넥타이로 무장을 마무리 한다. 금융권이나 공공기관등 보수적인 고객사나 50대 이상 임원이 참석하는 경우 특히 제냐 슈트를 입는다. 너무 밝아서 가볍지도 않고, 어두워서 무겁지도 않은 네이비블루가 주는 안정감에 힘입어 ‘저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라고 그들의 무의식에 추파를 던진다.


반면 자칭 자기들이 쿨 하다고 생각하는 기업들도 있다. 특히 대표이사가 셀럽에 가까운 대외활동 좋아 하고 사옥도 비끼 번쩍 하는 기업들에는 옷깃에 자주색 부토니에도 꼽고 와인 색 구두에 빨간 양말을 신기도 한다. 여기서는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구십도 로 절하는 것은 오히려 구닥다리로 비춰지고 꽝이다. 농경시대 근면성으로는 어필이 어렵다. ‘나도 너희만큼 쿨 할 수 있어’ 라고 눈에 힘을 빼야 하고, 약간 싸가지 없게 보여야 한다. ‘나랑 안하면 당신들이 손해’ 라는 태도가 의외로 자신감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제안 발표 이후에 첫번째 반응이 ‘좋네요, 합시다’라는 의사결정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일단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사실 수없이 많은 제안 발표를 했지만 발표 직후에 그런 즉각적 반응을 받았던 것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한 기업의 속성을 생각하면 속내를 바로 표현하지 않는것이 일반적이고, 사실 15분-20분이란 시간 내에서 한 기업이 갖고있는 복잡다단한 고민을 명쾌하게 풀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소위 심사를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는 것이 비슷비슷 한 내용을 최소 반나절 이상 들어야 하기 때문에, 심사위원의 마음을 한눈에 휘어잡는 쇼를 연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제안 발표라는 쇼의 목적은 파는 것에 있다는 당위성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예능 오디션에서도 ‘참 잘했어요’ 박수가 아니라 시청자들의 핸드폰 음원결재 클릭까지 끌어 내야 하는 것이다. ‘내용이 참 좋았다’. ‘PT가 아주 훌륭했다’ 라는 감상 평에 자족해서는 안된다. 높은 기준과 절박함으로 준비해야한다. 물건을 팔러 온 것이니 물건을 사겠다는 피드백이 나오지 않았다면 실패한것이다.


한편에서는 팔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쇼가 준비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한편에서는 가끔 엉뚱한 생쑈가 벌어지기도 한다.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다.


판교에 있던 한 인터넷 기업에 제안 발표 했던 날이 기억난다. Q&A 시간에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 갈등했던 그 날의 자괴감을 잊을 수가 없다. 발표를 모두 마치고 일층 현관 기둥에 기대서 한참 줄담배를 피웠었다.


양해각서를 맺고 수개월 동안 자료와 컨설팅으로 사전 지원을 했는데도 공정성을 위해서 경쟁입찰을 해야 한다고 통지를 받았다. 이미 상당한 공부와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실력으로는 당연히 뽑힐 것이라고 너무 자만했던 것일까?


그러나 제안 발표 당일 현장에 가보고서 이게 뭐 하자는 것인가 목안에 고구마가 가득했다. 소위 심사위원은 해당 분야를 전혀 모르는 타 부서의 직원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날 무작위로 추첨해서 불려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해당 업무를 수개월 동안 준비했던 담당자들은 배제가 되었고 갑자기 불려온 여러부서의 낯선 직원들이 멀뚱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공정함을 위해서였다.


평가의 틀은 매우 객관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사소한 룰이 많았으며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모두가 경직될 수 밖에 없었다. 정해진 룰의 준수 여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질문에 대한 답변의 경우에 Yes, No 로 짧게 답변해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 왜 네 생각을 길게 이야기 하느냐 식으로 지적이 들어왔다. 예를 들어, 해당 업무에 파견 직원을 몇명 투입하는 것이 맞느냐 물음에, X명 투입이 적절하다는 답으로 마쳤어야 했다. 해당 업무의 속성상 파견은 적절하지 않고 업무의 결과까지 책임지는 완전 도급을 추천한다고 했을 때 답변 태도 문제로 지적을 받았다. ‘묻는 질문에만 답을 하시라, 고객사의 질문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볼펜을 따각 거린다. 제출한 자료도 왜 제시한 30 페이지를 넘겼느냐 시비를 건다. 참조 자료가 들어있어서 이지, 본문 내용은 30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고 설명해도 기준을 초과했으니 감점대상이라며 근엄하다.


왜 옳은 방법과 정답을 찾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공정한 척, 일하는 척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이런 공정해 보이는 평가과정을 준비하고 채점표를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야근을 했을까 허허 한숨이 나온다.


의사결정에 대한 비난이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글로벌 기업 삼성이지만 여전히 그룹이 만든 직무적성검사를 시행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동기일 수 있다. 왜 표준화 테스트를 여전히 시행하고, 경력, 역량, 다면평가, 포트폴리오등 온갖 새로운 시도를 적극 도입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 알면서도 적극적이기 조심스런이유는 채용 방식을 바꿀 경우 불어 닥칠 비난이 너무 거세고 두렵기 때문 아닐까? 총장 추천제 등 소신을 갖고 진행했을 경우 대학을 줄 세운다는 비난 등이 예상될 것이다. 몇몇 계열사가 공채를 건너 뛰었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던 사례도 기억이 난다. 금수저만 뽑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누구도 정면대응 하고싶지 않을 것이다. 시시비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공정성이 제일 중요하고 객관식 표준화된 평가가 설명하기 쉬운 대안이다. 결국 담당자 자신의 의견, 소신이 앞장서지 않는다. 뒤로 숨는다. 책임지고 싶지 않고,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 리더의 탓이다. 예전에 누군가가 소신 있게 의사결정을 했으리라. 그러나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하자 쥐 잡듯이 ‘누가 이렇게 한 거야’ 라며 자기만 쏙 빠지던 윗사람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담당 실무자는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자기 목소리를 내였다가 아무도 지켜주지 않고, 아무도 힘 보태지 않고 혼자 독배를 마시고 짐을 싼 선배들을 많이 본 것이다. ‘소신껏 하면 X된다’는 가설이 정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신은 술자리에서나 떠도는 이제는 낭만이 된 전설일 뿐이고, 책임지지 않는 채점표 많은 조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업체 선정을 위해서 제안 발표를 준비할 때 권하고 싶은 팁 하나. 당연하지만 의외로 많이 지켜지지 않는다.


제안 평가 채점표에서는 가격비교를 빼는 것이 옳다. 제안 평가에서는 역량 중심으로만 업체를 선정하길 바란다. 가격 비중이 아무리 작아도, 역량 평가에서 큰 차이 나기가 어려우니 가격에서의 미세한 차이가 최종결과에 절대적 쏠림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제안 발표는 역량으로만 평가해서 우선 협상 대상을 선정하고, 가격은 그 이후에 우선 협상 대상과 치열하게 협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수한 경력직 팀장을 뽑는 것과 비교해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역량과 경험을 갖고 있는지 적임자를 우선 뽑고자 하지 않겠는가. 팀장 후보들을 불러놓고 누가 연봉을 적게 받겠느냐 순으로 팀장을 뽑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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