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장

by 이인삼각

혼자 떠나는 해외 출장이 자주 있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 체크인을 하고 탑승권을 받으면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삼성화재 여행자보험 카운터였다. 낯선 곳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병, 분실 및 기타 사고에 대한 여행자 보험은 보장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보험료이기 때문에 가입하는 것이 득이었다. 항상 가장 비싼 사망보험 상품을 계약하면서 일정은 시작되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여행은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의 나를 잠시 멈추고, 새로운 나를 만나러 떠나는 길은 한편으로 서글프고, 외롭고, 동시에 설레었다. ‘다시 원래 자리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떠나면서 본 가족들의 얼굴이 마지막일 수 있어’라는 적당한 비장함이 있었고 새롭게 시작하는 고독이었다.


동행하는 동료나 직원들이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급적이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했다.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아 칸막이를 올리면 마치 동면에 들어선 겨울 곰처럼 편안했고, 전화 인터넷의 개입이 없는 긴 비행 시간이 좋았다. 취침을 유도하는 낮은 조명이 깔리면 독서등을 켜고 빈 노트와 연필을 펼쳐놓고 위스키 한잔을 시켰다. 수도원 어느 구석 방에 들어와 있는듯, 머리 속 모든 복잡함을 빈 노트에 고백성사 하듯 적기 시작했다. 잔뜩 꼬여버린 실타래가 하나씩 천천히 풀려 나가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아침 일정 특히 첫 미팅은 항상 여유 있게 시작했다. 반드시 오전에는 수영을 하려했고 최소한 스트레칭을 하고 성경을 읽었다. 호텔 주변의 가벼운 산책 모두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는데, 그것은 낯섦이 주는 각성 때문이어서 도시의 아침 냄새, 햇빛, 거리의 소음 모든 것이 열려진 감각으로 몇배 확장되어 들이닥쳤다. 저녁식사 이후에는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노트북 음악을 크게 틀고 반신욕으로 마무리했다. 손님이나 일행 때문에 한잔을 더 해야 하면 호텔 바에서 Nightcap 한잔으로 정리했다. 서울에서의 일상과는 달리, 낯선 곳의 나는 건강했고, 치열했고, 새로운 삶의 모든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혼자가는 출장이 있었다. 특히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가 정통 ‘링스(links)’ 코스에서 골프 라운딩이어서 기대가 컸던 출장이었다. 해안의 강한 바람으로 오랜 기간 형성된 사구 지형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링스 코스는 모래가 다져져 단단한 페어웨이가 되고, 바람에 침식된 곳이 벙커가 되고, 목초가 자라 러프가 되어버린 원시 느낌 그대로였다. 토요일 밤에 더블린에 도착했다. 일요일 오전에 택시를 타고 Royal Dublin Golf Club으로 향했다. 다운타운을 가로질러 동쪽 해안에 도착, 목조 다리를 건너고 해안선과 나란히 누워있는 Bull Island 섬에 들어섰다. 5월이었는데도 낮은 바람이 불어서 인지 화창한 가을 날씨 느낌이었다. 파란 하늘은 무척 높았지만 낮은 양떼 구름들이 길게 가로지르며 파란 바탕을 채우고 있었다. 붉은 벽돌의 낮은 지붕과 굴뚝, 하얀 목조의 클럽 하우스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골프 클럽과 끄는 카트를 빌리고 혼자 라운딩에 나섰다.


황량했다. 시야가 보이는 지평선까지 나무는 외롭게 몇 그루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온통 낮은 목초들과 억새들 뿐이었다. 오른쪽으로는 해안 둔덕과 그 너머로 파란 파도들이 멀리서 계속 다가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디로 출발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홀과 홀 사이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았고 페어웨이와 러프의 경계는 멀리서는 도저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곳곳에 물결처럼 드리워진 그늘들이 높낮이가 심한 구릉의 페어웨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삭막하고 단단한 광야였다.


파5 코스에서 어렵게 3온을 한 뒤 긴 버디 퍼트가 남아있었다. 최대한 가까이 붙여서 파라도 해야지 했는데 남은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남은 파 퍼트도 홀을 아깝게 스치고 말았다. 스코어카드에 몽당연필로 보기로 적으려 는데 ‘파로 적어도 되지 않을까?’ 하며 타수를 줄이는 내 손이 보였다. 낯선 골프장에서 혼자 라운딩 하면서, 아무도 보지않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스코어를 거짓으로 적고 있었다


전반 9홀을 마치면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가 다시 후반 9홀로 나가는 코스 레이아웃이었다. 그러나 막상 혼자 치는 골프는 너무 외로웠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지금 누리고 있으면서도 나의 불평은 끝이 없었다. 다음 홀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계속 헤매고, 바람은 불고, 러프로 들어가면 공은 찾을 수 없어 계속 잃어버리고, 무엇보다 이 순간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시차 때문인지 몸은 무거워지고 9홀만 치고 들어갈까 투덜대는 나를 발견했다.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한 나름 매너 있는 골퍼라고 자신했던 나는 스코어를 줄여 적고 있었다. 오리지널 링스 코스는 꼭 가봐야 한다고 버킷리스트 떠들면서도 정말 원했던 걸까 당황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일랜드 황량한 바닷바람과 모래언덕 위에서 거품과 껍데기가 사라진 나를 만났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혼자 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운동을 한다. 건강하고, 치열하고, 여유 있는 삶도 있었지만, 괜찮은 척 속이려 하고 속고있는 다른 삶도 있었다. 해외출장은 고독으로의 초대였고, 고독은 다양한 나를 정면으로 만나게 해주었다. 그동안 바쁜 일상에서 무심코 잊고 있었던 날것의 내가 일어나고, 새로운 눈이 떠지고 새로운 생각이 깨어났다. 사실 해외출장은 짧은 기간 내에 많은 미팅과 협상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고 일정 사이에 빈틈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빈틈들 사이로 만나게 되는 한번의 작은 죽음과 한번의 새로운 삶의 기회가 귀하고 그립다. 또 언제일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낯선 도시로 혼자 떠나는 다음 해외출장이 많이 기다려진다.


‘지독하게 고독 하라, 혁명과 변화는 그 순간 시작된다’ - 대만 작가 장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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